사랑하고 있습니다.
질문) “저는 지금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미 가정이 있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저와 그분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혼자 살고 있고요.
그분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가족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너무 큽니다.
한 번의 이혼으로 이미 상처가 깊은데,
이 인연마저 끊는다는 게 너무 두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답) 이건 단순한 연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그 마음이 지닌 공허와 외로움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흔들리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의 밑바닥에는 ‘나도 누군가에게 온전히 사랑받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당신의 그 마음은 결코 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방향이 지금 업(業)의 소용돌이안에 있을 뿐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상황을 “애착(愛着)”이라 합니다.
사랑(慈愛)은 자유를 주지만, 애착은 속박을 낳습니다.
《법구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애착에서 슬픔이 생기고,
애착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애착이 없는 자에게는 슬픔도, 두려움도 없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고통은
사랑이 아니라 애착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분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절박함,
그 마음이 바로 집착의 형태로 번진 것입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그 마음이 순수하기를 바라지만,
불교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사로잡힌 마음’입니다.
질문) “그럼 사랑하면 안 되는 걸까요?”
사랑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걸 억누르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사랑에도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금강경》에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했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즉, 사랑하더라도 ‘붙잡으려는 마음’ 없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랑은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함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의존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어야만 존재하는 감정’이 아니라,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慈悲)의 사랑입니다.
지금의 당신은 사랑이 아니라 결핍을 채우고 있습니다.
결핍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끝내 고통으로 바뀝니다.
심리학에서도 비슷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런 관계는 흔히 “구원형 사랑”이라 부릅니다.
상처받은 두 사람이 서로의 결핍을 메우려 하다가
서로를 더 깊은 상처로 이끌어갑니다.
그건 치유가 아니라 상호의존적 고통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구속할 때 불안이 되고,
서로를 놓아줄 때 평화가 됩니다.
질문) “그래도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그분이 없으면 하루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아픔은 진짜입니다.
그걸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뿌리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나의 결핍’입니다.
'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그 결핍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사랑이 아닌,
나 자신을 다시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유마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스스로를 깨닫지 못한 자는, 사랑을 통해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간다.”
이 말은, 자기 안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보지 못한 채 사랑을 붙잡으면
그 사랑이 결국 자신을 삼킨다는 뜻입니다.
질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사랑을 ‘놓는 것’으로부터 배우세요.
이건 그분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이 당신의 인생을 바꿔줄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그분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순간,
당신의 사랑은 집착에서 자비로 변합니다.
둘째, 외로움을 피하지 말고 바라보세요.
지금의 외로움은 공허가 아니라, 마음이 다시 태어나는 공간입니다.
하루 중 10분이라도 조용히 앉아
숨을 고르며 이렇게 말해보세요.
“이 외로움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
이 외로움은 나를 깨우고 있다.”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당신은 자기 자신과 사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용서와 책임을 구분하세요.
그분의 가정이 깨진다면,
그 고통은 당신의 업으로 돌아옵니다.
《잡아함경》에서는 말합니다.
“남의 눈물을 밟고 얻은 행복은,
그 눈물 위에 다시 떨어진다.”
사랑이 다른 이의 괴로움을 낳는다면,
그건 불교에서 말하는 ‘연민 없는 욕망’입니다.
지금의 관계를 끊는 것이
두 사람 모두를 살리는 자비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관계의 끝’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그건 버림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당신이 이 인연을 놓는다면,
그건 도망이 아니라 자기 존중의 시작입니다.
당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사랑을 버리는 게 아니라,
사랑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법구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화려한 꽃은 향기를 남기지 않지만,
진실한 행은 향기를 남긴다.”
지금의 사랑이 향기를 남기길 원한다면,
그건 불타는 열정이 아니라,
조용한 이해와 내려놓음에서 시작됩니다.
사랑은 때로, 이별의 형태로 완성됩니다.
그분을 잃는 게 아니라,
그분에게 집착하는 ‘나’를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을 때, 마음은 상처가 아니라 지혜를 남깁니다.
마지막으로 이 구절을 전하고 싶습니다.
“應無所住而生其心(응무소주이생기심)”
— 《금강경》
“어디에도 머무르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당신의 사랑이 머무름이 아니라 깨달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과의 인연이 당신을 아프게 했다면,
이제 그 인연을 자비로 돌려보내세요.
그 사랑을 놓을 때,
당신의 마음은 다시 자유로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