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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경 4편], 당신의 바다는 얼마나 깊은가요

'아뢰야식(阿賴耶識)'

by 이안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닫으려는 순간이었습니다.

문틈 사이로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아주 오래전에 맡았던 어떤 낯선 향기가 훅 하고 코끝을 스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멈칫하게 됩니다.

분명 머리로는 까맣게 잊고 살았던 기억인데,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습니다.

특정한 계절의 냄새, 혹은 누군가의 옷깃에서 나던 향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핑 돌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짙은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우리는 흔히 "잊었다"라고 말합니다.

"다 지나간 일이야"라고 스스로를 달래기도 하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내 머리는 잊었을지 몰라도, 내 마음의 어딘가는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저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펼쳐볼 이야기는 바로 이 '기묘한 마음의 저장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수천 년 전, 불교의 심층 심리학인 《능가경》은 이미 이 마음의 깊은 바다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아뢰야식(阿賴耶識)'입니다.


경전의 세계


《능가경》의 무대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랑카산의 정상입니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문수보살에게 마음의 구조를 설명하며, 아주 아름답고도 무서운 비유를 듭니다.


"그대여, 저 바다를 보라. 바람이 불면 파도가 춤을 춘다. 끝없이 일어나고, 부서지고, 사라진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이나 슬픔, 분노 같은 표면적인 감정들은 저 파도와 같다."


하지만 부처님은 파도 아래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다 깊은 곳은 어떤가? 그곳은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 깊은 곳에는 흘러들어온 모든 물이 모여 있다. 이것이 바로 제8식, 아뢰야식이다."


여기서 '아뢰야(Alaya)'라는 말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창고' 혹은 '저장소'라는 뜻입니다.

히말라야(Himalaya)가 '눈(Hima)의 저장소(Alaya)'인 것처럼, 아뢰야식은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겪어온 모든 경험과 감정이 저장되는 거대한 창고입니다.


능가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뢰야식 장제종자(阿賴耶識 藏諸種子), 수업훈발(隨業熏發)."

"아뢰야식은 모든 경험의 씨앗, 즉 종자를 저장하고 있으며, 인연을 만나면 그 씨앗이 싹터 현실로 드러난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은 단순히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마치 향기가 옷에 깊게 배어들듯, 마음 깊은 곳에 씨앗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문틈 사이의 밤공기 같은 아주 작은 자극만 있어도, 그 깊은 바닥에 잠겨 있던 씨앗은 순식간에 파도가 되어 표면으로 솟구쳐 오릅니다.


교학적 해석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내 안에 그런 거대한 창고가 있다면, 그 창고가 바로 변하지 않는 '진짜 나', 즉 영혼인 것일까?"

여기서 능가경의 아주 중요한 통찰이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뢰야식을 '영원불변한 영혼'이나 '참된 자아'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습니다.

"아뢰야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강물과 같다."


강물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흐릅니다.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은 다르죠.

아뢰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경험이 들어오면 옛 기억과 섞이고,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능가경이 말하는 아뢰야식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경향성'으로 남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개에게 물린 적이 있다면, 아뢰야식에는 '개의 모습'이라는 사진이 저장되는 게 아닙니다.

대신 '개는 위험하다'는 자동 반응의 공식, 즉 두려움의 경향성이 저장됩니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만 오면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굳어버리는 것이죠.


둘째, 아뢰야식에는 주인이 없습니다.

이 거대한 저장고를 통제하는 '자아'라는 주인은 없습니다.

그저 켜켜이 쌓인 데이터의 흐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無我)입니다.


셋째,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뢰야식은 변할 수 있다."

만약 이 저장고가 꽉 닫힌 금고라면, 우리는 과거의 상처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트라우마는 영원한 감옥이 되겠죠.

하지만 능가경은 이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의 이유이며, 식을 굴려 지혜를 얻는다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희망이 됩니다.


현대적 연결


이 2천 년 전의 심층 심리학을 현대의 언어로 번역해 볼까요?

저는 여기서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떠올립니다.

주인공 조엘은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워,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를 찾아갑니다.

기계는 뇌 속의 구체적인 기억들을 하나하나 삭제해 나갑니다.

함께 갔던 바다, 웃음소리, 싸웠던 기억들... 뇌 속의 데이터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어떤가요?

모든 기억이 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낍니다.

머리의 기억은 지워졌지만, 마음의 깊은 바닥, 즉 아뢰야식에 남은 '사랑의 종자'는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신체화된 기억(Embodied Memory)'이라고 부릅니다.

트라우마 연구의 석학 베셀 반 데어 콜크는 "몸은 기억한다"라고 말했죠.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기억, 머리로는 잊었지만 심장 박동과 근육의 긴장으로 남아있는 기억.

이것이 바로 능가경이 말한 '종자'의 작용과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또한 뇌과학의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은 능가경의 희망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합니다.

우리의 뇌는 고정된 기계가 아닙니다.


반복된 생각과 행동은 뇌의 회로를 물리적으로 바꿉니다.

"수행을 통해 아뢰야식의 종자를 정화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새로운 경험과 훈련을 통해 뇌의 연결망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현대 뇌과학의 결론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데이터에 지배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데이터를 다시 쓸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은 어떤 감정의 파도에 시달리셨나요?

불안함, 분노, 혹은 이유 모를 우울함이 찾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보통 그 파도를 없애려고 애를 씁니다.

"화내지 말아야지", "우울해하면 안 돼"라고 자신을 억누르죠.

하지만 파도를 손으로 눌러서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르면 누를수록 파도는 더 거세게 튀어 오를 뿐입니다.


능가경은 우리에게 조용히 권합니다.

"파도와 싸우지 마라. 대신 파도를 만들어내는 그 바다의 깊이를 바라보라."

지금 올라오는 그 감정은, 당신이 잘못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 어쩌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시절부터 내 아뢰야식 깊은 곳에 쌓여있던 씨앗이 잠시 싹을 틔운 것뿐입니다.


"아, 내 안에 이런 두려움의 종자가 있었구나."

"내 깊은 바다가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그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파도에 휩쓸리는 '피해자'가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치유의 시작입니다.


바다의 깊이를 아는 자는 파도에 흔들릴지언정 전복되지 않습니다.

오늘 밤, 아주 잠시만이라도 눈을 감고 내 마음 깊은 곳의 소리를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그곳에 당신의 모든 시간이, 그리고 앞으로 피어날 새로운 지혜의 씨앗이 숨 쉬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바다는, 어떤 색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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