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안 Nov 10. 2024

백수, 돌싱남, 그레이아나토미

-그리고 가난-

15년 만에 ‘그레이 아나토미’ 정주행을 시작했다.


이 드라마를 꼭 보고 싶었다기보다는

밤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다.     


올 10월 말쯤 전북 완주에 있는

문화 관련 공기업 재단에서 면접을 봤고

연봉 4천에, 팀장자리 합격했었다.      


그래서 오늘(11월 10일)

오후 1시 30분 전주행 기차표를

끊어놨고,

내려가서 살 집도 어느 정도 확정해 둔 상황이었다.
(보증금 300/ 월세 30)     


이 정도면

지방은 생활비가 싸니까,

월급에서 생활비를 제하고도

연 2000만 원 정도는 모을 수 있을 거 같았고


앞으로 10년을 일하면

돌싱남 혼자 남은 생을 사는 데 필요한

그럭저럭 쓸모 있는 노후자금을 모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사실 고백하자면

2020년에 MBC에서 명퇴를 할 때

나에게는 5억 원 정도의 퇴직금이 있었는데

2022년도에 아는 친구에게 맡겼다가

그 돈이 다 없어지는 바람에

빈털터리 실업자가 된 사연이 있다.      


하루하루 무일푼으로

부모님 집에 의지에서 사는

내 신세가 처량해서

야심차게 면접을 보고 합격을 했고,


'이제 나도 노후자금을 얼마라도 모아봐야지!'라는 결심에

여행가방을 챙겨 전주행 기차를 타러 집을 나서는데,


어머님이 갑자기

우시며 나오면서


“아버지가 이렇게 아픈데

나한테만 아버지를 맡기고 너는 가버리면

나는 어쩌냐”면서 매달리셨다.      


어제까지는 그래도 담담하게 버티셨는데

막상 내가 지방으로 간다니

국가유공자에 거동이 힘든 아버님을

혼자 돌보는 게 두려우셨나 보다      


1시간 정도를 아버지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다가

결국 전주행 기차를 포기하기로 했다.      


나름 괜찮은 조건의 취업기회를 포기한 덕분에

나는 다시 무일푼에 실업자에 돌싱남에,


시간이 흐느적거리면서 지나가는 것도 같고,

외롭고 쓸쓸함이란 염료에

몸을 푹 담가서 온몸을 푸른색으로 물들일 거 같은,


멜랑꼴리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치는

아버님의 병환을 호위무사처럼 지켜야 하는

생활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이게 바로

늦은 가을밤,

스텔라 캔 맥주에 [그레이 아나토미]를

보기 시작한 이유

이 미드는 19 시즌까지 있으니까,,

하루에 하나씩 보면

1년은 볼 거 같다.      


앞으로 1년 동안

나의 가을, 겨울, 봄, 그리고 여름밤은

매일 캔맥주 하나와 디즈니플러스에서 틀어주는

[그레이 아나토미]가 함께 할 듯하다.      


노부모를 모시는

실업자 돌싱남의 신세는

참으로 한심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모든 백수들이 바라는

더딘 시간 속의

게으름뱅이 대마왕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어떤 타이틀보다

정확한 건,

가난뱅이다.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밤이 아닌,

지리한 가난이

가을밤을 스치는 계절이,


지나간다.

작가의 이전글 너의 추억이 감당 할 수 없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