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공의 지혜로 삶을 비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판단합니다.
좋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내 편, 네 편.
예쁘다, 못생겼다.
성공했다, 실패했다…
이러한 이분법적 분별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 유용해 보이지만,
바로 그 분별이 고통의 뿌리가 되기도 합니다.
『반야심경』은 이 사실을 꿰뚫고,
다음과 같은 구절로 우리를 일깨웁니다.
“不垢不淨 不增不減.”
불구불정 불증불감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이 문장은 너무도 간결하지만,
그 안에 우리의 세계관을 뒤흔드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깨끗함’과 ‘더러움’,
‘성장’과 ‘쇠퇴’,
‘획득’과 ‘상실’이라는 관점에서 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말합니다.
“그건 다 네 마음의 분별일 뿐이야.”
예를 들어볼까요?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실패자’가 되는 걸까요?
사람에게 거절당했다고 ‘매력 없는 사람’이 되는 걸까요?
삶이 잠시 흔들렸다고 ‘망가진 인생’이 되는 걸까요?
이러한 판단은 모두
우리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해석의 프레임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상(相)에 머문다’고 말합니다.
즉, 보이는 형상, 조건, 결과에 사로잡혀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믿는 것이지요.
하지만 존재란
그 겉모습 너머에 훨씬 더 깊은 층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잠시 그렇게 드러나 있을 뿐이고,
우리는 다만 그 일시적인 상태를 고정된 의미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좋은 일이야.”
“이건 나쁜 징조야.”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한심한 인간이야.”
이런 식의 끊임없는 판단과 평가가
우리 마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그 분별에 따라
우리는 늘 스스로를 흔들고, 깎고, 몰아붙입니다.
그런데 만약
‘있는 그대로 보기’를 연습한다면 어떨까요?
기분이 좋다 → 그저 기분이 좋은 상태일 뿐
일이 꼬였다 → 그저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전개된 것일 뿐
실수했다 → 학습의 기회가 나타났을 뿐
이렇게 분별 대신 관찰의 시선을 가지는 순간,
우리는 평가가 아니라 이해와 수용의 공간에 서게 됩니다.
불교 수행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지관(止觀)’은
이러한 판단 없는 주시의 훈련입니다.
그것은 곧 삶을 ‘조용히 바라보는 눈’을 기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분별을 내려놓는 연습을
작은 실천들로 이어갈 수 있습니다.
감정이 올라올 때, 해석하기 전에 관찰한다.
“지금 화가 났구나.”
“지금 내 마음이 불편하구나.”
이렇게 라벨링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정=나’라는 동일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건 그분의 시선일 뿐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늘 변화 중이며,
누구의 말로도 완전히 정의될 수 없습니다.
“이건 정말 나쁜 일이다!”
그렇게 단정 짓기 전에
“잠시 두고 보자.”
그렇게 한 템포 쉬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은
단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나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깊은 연습입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은 언제나 하나로 향합니다.
“모든 것은 공하니, 거기에 머물지 말고, 바라보라.”
보되, 붙잡지 말고.
듣되, 머물지 말고.
느끼되, 그 감정이 전부라고 믿지 말고.
이러한 지혜는
우리를 ‘판단하는 삶’에서
‘깨어 있는 삶’으로 이끕니다.
분별은 우리가 세상을 빨리 정리할 수 있게 해 주지만,
공의 눈으로 보는 삶은
세상을 더 깊이 있게 살아가게 해 줍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분별과 고정된 생각에서 벗어날 때,
우리 안에 생겨나는 ‘두려움 없음’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즉, 반야바라밀의 궁극적인 열매,
무소득(無所得)의 자유로운 삶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