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지혜로 세상을 비추다"
우리는 늘 무언가가 ‘시작되고’, ‘끝난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계절이 오고 가고,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하루가 밝고 저물고, 관계가 맺어지고 끊어지고…
이러한 흐름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다시 한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이 세계의 흐름에
급제동을 겁니다.
“不生不滅,不垢不淨,不增不減.”
불생불멸, 불구부정, 불증불감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어떻게 ‘생겨나는 일’이 없고, ‘사라지는 일’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요?
여기서 ‘생겨남’과 ‘사라짐’은
우리가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잠정적으로 머무는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꽃이 피었다’고 말할 때,
정확히 말하면 ‘피는 중’인 그 상태를 잠시 붙잡아 이름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꽃이 졌다’고 할 때도
그것은 모양이 바뀌고, 기능이 바뀌고,
인식이 바뀐 것일 뿐입니다.
그 꽃을 구성하던 원소들은 여전히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고,
그 향기는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 있으며,
그 생명은 다른 것의 거름이 되어 또 다른 생명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하자면
실제로 ‘완전히 생겨난’ 것도 없고,
‘완전히 사라진’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화일 뿐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깨우침을 줍니다.
바로 무상(無常)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그래서 집착할 필요도 없고,
절망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괴로움은
거의 대부분 ‘변화에 대한 저항’에서 옵니다.
나는 늘 이랬어야 하는데.
그 사람은 변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니었어야 했는데.
이런 말들 속에는
무언가가 영원히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말합니다.
“그 무엇도 멈춰 있지 않다.
모든 것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한다.”
그렇다면,
‘끝났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서조차
우리는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삶의 마지막은 또 다른 전환입니다.
슬픔 역시 끝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배움이 있고, 변화가 있고,
또 다른 감정으로 나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불생불멸”이라는 말은
철학적 선언을 넘어
우리 삶 속에서 고통을 줄이는 근본적인 시선의 전환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가르침을
현실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 첫걸음은
무언가가 ‘완전히 시작되고’, ‘완전히 끝났다고’
성급히 판단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관계가 끝났다고, 인연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일이 망했다고, 내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실패했다고, 내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변화 중이고,
우리는 그 변화의 흐름 안에서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생의 지혜,
그리고 무멸의 자비입니다.
『반야심경』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삶과 죽음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줍니다.
꽃은 지지만 향기는 남고,
사람은 떠나지만 기억은 흐르며,
과거는 끝났지만 그 안의 씨앗은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 말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두려움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잃을 것도, 붙들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변화는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우리가 그 안에서 더 성장하고, 더 깨어날 수 있도록
준비된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다음 편에서는
우리가 이러한 무상성과 공성을 실제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즉 분별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보기’라는
불교의 가장 실천적인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