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나’라는 존재를 너무도 분명하게 느낍니다.
이 몸, 이 마음, 이 기억, 이 이름, 이 직업, 이 가족…
이 모든 것이 나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지요.
하지만 『반야심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모든 고통을 건넜다.”
여기서 말하는 ‘오온(五蘊)’은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입니다.
색(色) – 몸, 물질
수(受) – 감각, 느낌
상(想) – 인식, 생각
행(行) – 의지, 반응
식(識) – 의식, 분별
이 다섯 가지는 마치 ‘나’라는 집을 구성하는 기둥, 벽, 지붕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오온이 모인 집 안에 살며, ‘이것이 나야’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반야심경은 말합니다.
그 다섯 가지는 모두 공하다.
즉,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누구인가요?
기쁘거나, 슬프거나, 피곤하거나, 설레거나…
어떤 상태든 그것은 ‘지금 잠시 그런 상태일 뿐’입니다.
그리고 곧 사라지고, 다른 것이 찾아올 것입니다.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매 순간 세포는 죽고, 태어나고, 바뀌고 있습니다.
어릴 때의 내 얼굴, 10년 전의 내 목소리,
오늘 아침의 내 기분조차 지금과는 다릅니다.
‘상(想)’과 ‘행(行)’, 그리고 ‘식(識)’은 더더욱 덧없습니다.
생각은 하루에도 수천 번 바뀌고,
의지는 상황에 따라 흔들리며,
의식은 피곤하면 흐려지고, 기쁘면 예민해집니다.
이런 유동적인 다섯 가지 조합이
과연 ‘영원한 나’, ‘진짜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불교는 이 질문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젓습니다.
“아니다. 너는 다만 인연 따라 잠시 그렇게 있을 뿐이다.”
이 말이 처음에는 두렵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나는 없다’니,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이 무아(無我)의 가르침은
결코 공허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해방의 선언입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괴로움을 느낄 때,
그것은 대부분 ‘고정된 나’를 전제로 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왜 이렇게 대우받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왜 아무도 몰라주지?”
“나는 절대 저런 사람처럼 될 수 없어.”
이 모든 생각의 중심에는
‘변하지 않는 나’,
‘비교 가능한 나’,
‘지켜야 할 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순간부터 고통은 조금씩 그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나는 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지금의 감정도, 생각도, 상황도
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그만큼 우리는 더 유연하게, 더 자유롭게
삶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바로 이 점에서
우리를 흔들어 깨웁니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나’가 아니다.
오온은 공하다.
너의 몸도, 감정도, 생각도, 의지도, 의식도
잠시 모였다가 흩어지는 인연일 뿐이다.”
이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여는 말입니다.
‘정해진 나’가 없다는 말은
‘정해진 한계’도 없다는 뜻이니까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정체성’이라는 말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SNS 속 나는 ‘이런 사람’이어야 하고,
이력서 속 나는 ‘이런 성과를 가진 사람’이어야 하며,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나는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든 ‘나’는 잠정적일 뿐이다.
그 무엇도 너를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지금의 나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실패한 나도, 지나가는 인연일 뿐.
완벽하지 않은 나도, 공한 오온의 흐름일 뿐.
남과 비교되는 나도, 실체가 아닌 인식의 그림자일 뿐.
이런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가볍고 자유로워집니다.
공을 아는 자는 집착하지 않고,
무아를 아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도 연민을 품습니다.
『반야심경』의 길은
자기 비하도 아니고, 자기 망각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진실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길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 무아의 시선이 확장되어
세상의 모든 생겨남과 사라짐을 어떻게 새롭게 비추는지,
즉 ‘불생불멸’의 통찰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