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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Mar 09. 2022

레테의 강

  고등학교 1학년 철학 시간이었다. 교목 신부는 레테의 강에 대해 설명하며 퀴즈 하나를 냈다.

  "망자는 명계로 가면서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게 되는데, 이 강물에는 특별한 효능이 있다. 무엇일까?"

  42명이 그득히 차 있던 그 교실에, 철학 수업을 듣는 학생을 꼽으려면 다섯 손가락도 널널했다. 대개는 엎어져 자거나, 다른 과목 수행평가 준비를 하거나, 학원 숙제를 하고 있었다. 서림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으니, 빈정거릴 마음은 없다. 다만 그 날은 유독 딴짓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17살 서림에게 딴짓은 기껏해야 철학 수업을 듣는 정도였다. 일종의 일탈이었다. 교목 신부가 낸 퀴즈가 어려웠기보다는 영 흥미가 없거나 무엇을 묻는 지조차 제대로 듣지 않은 학생들이 태반이었기에 답을 말하는 학생이 있을 리 만무했다. 교목 신부는 그 사실을 모르는지, 혹여 알더라도 진도를 나가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었는지 가냘픈 힌트를 제시했다.

  "이것은 우리 삶에 필요하기도 하고・・・."


  "망각."


  적막한 교실에 울려 퍼진 서림의 목소리에 가장 깜짝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마치 몸 속에 들어있는 다른 누군가가 서림의 입을 통해 대답을 한 것만 같았다. '뇌를 거치지 않았다'거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는 어구들이 이러한 경우를 나타내는 것인가 서림은 찰나 생각했다. 그녀는 종종 철학 시간에 자신이 한 답을 떠올리고는 했다. 철학이 도통 뭔지 알지도-지금도 물론 그렇다-, 알고 싶지도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일 리도 없고,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열 번도 넘게 읽었지만 그리 닳도록 읽었기에 거기에 레테의 강에 대한 언급이 없음은 자명했다. 17살의 서림은 자신이 일 년 뒤 망자가 되어 레테의 강을 떠다닐 것을 예언이라도 한 것일까?  




  서림이 그녀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향수를 간직하게 되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서림은 짙은 향수를 얻은 대신 한때 삶의 전부였던 것들을 잃었다. 기억, 우정, 생각, 더 보태자면 사랑 정도? 질량도 없는 것들이 질량 보존 법칙을 흉내내는 모양새가 제법 그럴싸했다.

  서림은 자신이 해리성 기억상실을 겪었다고 나름의 담담한 결론을 내린다. 처음에는 그 사건이 있었던 2017년 10월부터 2018년 2월의 기억이 토막이 난 뒤 증발했다. 순차적으로 2017년 전체가, 나아가 2018년까지의 기억이 서서히 사라졌다. 2019년에 예기치 않게 핸드폰이 박살나서 유일하게 그 시절이 남아있던 갤러리까지 말끔히 사라지고 나니, 비로소 그 해들은 더이상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었다. 그것이 꼭 불행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 시간 속에 녹아 있는, 제 고유의 결정을 간직한 추억들이 파묻힌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추억한다는 것이 우습지만 여튼 아쉽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이것이 서림의 짧은 인생에 있었던 사건 중 가장 큰 것이다. 그 밖의 크고 작은 불행들-부모님의 불화, 절교, 배반, 폭력 등-은 당시에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지라도 결국 누구나 스쳐가는 인생의 간이역들이라 위안을 삼으니 견딜 만 했다. 무엇보다 '그때보다는 참을 만 하다'는 자기 위로는 실로 강력했다. 18살 서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곳에 다 담을 수 없지만, 서림을 위해 호기심을 덜어내는 아량을 베풀기 바란다. 그 사건을 읊어내면 다시 서림의 몸은 생존을 위한 방어 기제를 가감없이 작동시킬 것이고, 그러면 또 어떤 추억을 잃어버릴 지 두려워야만 한다. 단지 말을 조금 잘못 해서, 뜻이 조금 왜곡돼서, 약간의 비틀어짐으로 그녀의 우주는 구원받을 수 없는 어둠으로 추락했다. 그 후로 서림의 말수는 급격히 줄었다. 세상과 통하는 창을 닫았다. 감정 기제는 단단히 고장이 나서, 누군가 어깨를 툭 치기만 해도 눈물이 흘러나오는 위태로운 나날이 반복되었다. 그러니까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나오고 마는 것이다. 웃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더는 재밌는 일이 없었고 더는 기분 나쁜 일이 없었다. 내신, 모의고사, 수능 따위를 준비하고 남은 시간에는 늘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극단적인 무신론자는 매일 밤 잠에 들며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배우 김태리는 기억력이 나쁘면 세상 살기 좋아진다고 말했다. 서림은 그 말에 동감했다. 생각해내기를 멈추고, 기억해내기를 멈추고, 연(緣)을 이어내기를 멈췄다. 적어도 숨이 트였다.  




  "운명을 믿으세요?"

  무릇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그렇듯, 발단은 호기심이었다. 서림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타인에게 흥미를 느끼고, 관심이 생기고, 그 관심은 쉽게 시들거나 호감으로 활짝 피고는 했다. 

  역사적으로 호기심은 인간을 구원하기도 한없이 추락시키기도 했다. 이번 호기심은 뜻밖에도 구원이었다. 그도 슬픔을 느낄까? 행복할 때는 남들처럼 함박웃음을 지을까? 그도 자신과 다름없는 후천적인 사이보그인 걸까? 그렇다면 그는 무슨 아픔이 있었을까? 서림에게는 적어도 내일이 기대되지 않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호기심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일종의 기대감은 다음날 아침을 맞이하는 까닭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그래서 내 아픔을 함부로 치켜세우거나 위로를 종용하지 않는다. 당연히 가원도 아픔이 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는 아픔조차도 잔잔하다. 솟구치거나 휘몰아칠 법도 한 이야기들이 가원의 아픔이 되면 잔잔한 파랑으로 남는다. 잔잔해서 더 아프다. 어린 가원에게 다가가 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면 어린 가원은 당황하고 민망해서 밀쳐내겠지만.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남자 주인공 최웅은 사람은 변하기 때문에 건물만 그린다고 밝힌다. 가원은 자신이 변해간다고 말했다. 건물도 끊임없이 변한다. 벽지를 도배하고, 새시를 갈아 끼운다. 그래도 최웅은 계속 건물을 그린다. 가원은 건물 같은 사람이다. 언제 어디에서 만나도 가원일 거라는 확신이 있다. 2년 후에 만나게 되더라도,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마주치더라도, 모종의 이유로 성이나 이름을 바꾸더라도. 태연하게 지금처럼 나란히 서 있거나 나란히 걸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를 만나고 생각해내기를, 기억해내기를, 연을 이어내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숨이 트였다. 언젠가 그의 본질적인 어리석음이 극복되는 순간이 있다면, 대상이 누구이든 그 모습은 퍽 아름다울 것 같다.

  편지를 보내고, 편지를 받고, 글을 받고, 글을 보내고, 마음을 보내고 마음을 받고. 사이보그가 되기 전 줄곧 하던 일을 어느새 하고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이 실이 끈덕지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덕분일까. 서림은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졌다. 현실화 가능할 것 같은 몽상을 가끔 꾸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도, 추억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 보름달 아래 가원을 보며 어쩌면 동월이몽을 꾸었다고 서림은 생각한다. 아니, 애초에 현실화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공상이었던가. 그는 기꺼이 내지는 흔쾌히 레테의 강을 건널 것만 같다. 

  세 가지 길에 직면한다. 그곳에 머물거나, 그것을 추억으로 묵인한 채 오늘을 살아가거나, 이 양자 속에서 자기자신을 놓거나. 셋 다 나쁘지 않다. 다만 애초에 그 추억을 주체적으로 안고 나아가는 건 선택지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아쉽다가도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나쁘고 그렇지 않고를 떠나서 서림이 마땅히 걸어야만 하는 길이다. 그것이 서림이 추구할 수 있는 그녀의 세계의 가장 최선의 모습이다. 다만 당분간은 어릴 적 꿈이 아닌 어릴적 꿈으로 남겨둬도 될까.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을 유예해도 괜찮을까. 이 편지는 과연 부쳐질까. 

  서림이 이 글을 쓴 목적은 분명하다. 서림이 또 다시 인생을 살아가다 상실을 마주한다면, 적어도 이 글에 담긴 추억과 감정만은 잃고 싶지 않아 기록한다. 적어도 이 글은 훗날 다시 지금의 감정을 복기할 수 있는 마루더즈 맵이 될 것이다. 레테의 강에 침잠하더라도 도무지 놓치고 싶지 않은, 그와의 추억은 분명 소중하다. 소중한 만큼 욕심이 없어질 수도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경험도 진귀하다. 

  "운명을 믿으세요?"

  17살의 서림이 일 년 뒤를 예언했다면, 20살의 서림은 어쩌면 자기 충족 예언을 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타자와 낯섦을 넘은 직감이자 끌림이었다.  

  아마도 이 글에는 '사랑'은 없지만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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