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너의 투명한 순수함이 너무 좋아
너무나도 입이 짧은 우리 딸은 하루에 거의 한 끼를 먹는 듯하다.
아침은 매일 늦잠을 자서 유치원으로 허겁지겁 가기 바쁘고,
점심은 스스로 먹으니 (게다가 편식이 심하니) 반찬도 제대로 안 먹고 대충 몇 숟갈 시늉만 할 테고,
유일하게 저녁시간에는 유치원에서 열심히 뛰어놀아서 졸리다는 핑계로 몇 입 먹지도 않고(때로는 아예 한 입도 안 먹고) 뻗어서 코까지 골며 잠들어 버린다.
더 어렸을 때 식습관을 제대로 들이기 위해서 육아서와 전문가, 주변 지인의 조언대로 식사시간에 안 먹으면 밥을 치우고 간식을 거의 안 주는 것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웬걸... 안 그래도 마른 우리 딸은 엄마와 달리 음식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짜증만 늘어갔다.
배고프면 먹는다는 말은 우리 딸에겐 맞지 않았다.
불행히도 3일 차 정도에 짜증 섞인 괴성(?)으로 우는 아이를 보며 난 결국 항복해 버렸고,
그녀가 먹고 싶을 때면 언제나 먹을 것을 챙겨주는 엄마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한 끼 먹는 식사가 안타까워 5세 딸을 쫓아다니며 밥 한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떠먹이고 있다.
또래의 대부분이 그렇듯 집에서만 키웠을때는 (안먹으려는 것을 떠먹이느라) 매우 오래걸려도 적지 않은 세끼를 챙겨먹었는데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과자, 사탕, 젤리 그리고 핫도그, 감자튀김 등을 맛본 이후로 엄마의 부족한 요리솜씨에서 나온 음식보다 훨씬 맛있는 것들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크.
우리 가족은 생일뿐만 아니라 각종 기념일을 다 챙기는 편이다.
게다가 딸바보 아빠는 하다 하다 555일, 777일, 1234일 같은 특이한 날짜까지도 챙기기 시작하였고 덕분에 모든 기념일에는 딸이 제과점이든 아이스크림 가게든 원하는 곳에 가서 케이크를 취향껏 고르게 하였다.
5월부터 결혼기념일, 어린이날, 딸생일까지 여러 기념일로 케이크를 벌써 세 통 넘게 먹었는데 어느덧 남편 생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어젯밤 12시까지 그림 그리다가 늦게 잔 딸을 억지로 깨워 허겁지겁 유치원을 등원시키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데 그녀가 말했다.
"엄마,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요."
문득 어제 같이 만든 생일 카드가 생각나서 나는 물었다.
"아빠 생일 축하해 주고 싶어서?"
"아니, 케이크 먹고 싶어서. 빨리 사서 먹고 싶어."
(농담이라도 축하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 순수함^^;)
며칠 전부터 딸의 제일 친한 친구가 그녀의 엄마생일이 다가온다며 미술학원에서 '캐치티니핑 하우스'를 종이를 오려 붙여서 만들었다.
아마도 자기들이 좋아하는 캐릭터이니까 엄마에게 선물해 주면 좋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며칠동안이나 정성들여서 만들고 있다니 그 마음도 참 이뻤다.
남편이 퇴근하는 길에 딸을 데리러 미술학원에 들른 날.
딸 친구의 그런 모습을 보자 다가오는 자신의 생일을 인식한 듯 집으로 돌아와 딸에게 말했다.
"우와.. oo는 정말 예쁜 생일 선물을 만들어줘서 엄마가 좋아하겠다."
(딸은 장난감을 만지며 무반응)
"아빠 생일이 다음 주 월요일인데 우리 딸은 뭐 없어?"
"(못 들은 척 장난감을 몇 개 가져와서는) 아빠, 빨리 옷 갈아입고 장난감 같이 갖고 놀자.
내심 남편의 서운한 표정이 보이길래 주말 동안 남편이 시댁에 간 사이 딸과 함께 스케치북, 색연필, 색종이를 꺼내서 생일 축하 카드를 만들었다.
어느새 한글도 많이 늘어서 엄마의 도움으로 편지도 쓰고 옆에 그림도 그리고 색종이를 잘라서 붙이며 즐겁게 대형 생일축하카드를 완성하였다.
"우리 이거 비밀이야. 아빠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 나중에 짠 하고 보여주자."
딸은 상기된 얼굴로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자."
"아빠가 어제처럼 또 물어도 '생일 선물 준비 못해서 없어요'라고 대답하는 거야. 알았지?"
그러면서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손에 걸고 약속을 하였고 책장 끝 공간의 스케치북 사이에 대형 편지를 숨겨놓았다.
볼일을 마치고 남편이 돌아오자 딸은 갑자기 묻지도 않았는데 아빠를 큰 목소리로 부르며 말했다.
"아빠! 나는 선물 없어. 아빠 생일 선물 아무것도 안 했어. 없어."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말을 계속하더니 씨익 웃으며 편지를 숨겨 놓은 책장 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작은 손바닥으로 그곳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아빠, 여기는 절대절대 보면 안 돼. 여기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보면 안 되는 곳이야."
나는 실소가 터졌고 남편은 너무나 눈에 보이는 뻔한 딸의 말과 행동에
"그래, 알았어."라며 한참을 웃었다.
나는 '거짓말'을 참 싫어한다.
거짓말을 싫어하는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커왔고, 그래서 아주 사소한 약속도 꼭 지키려 한다.
만약 지키지 못할 것 같다면 예의상(?)이라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그만큼 나에게는 말로 인한 신뢰가 중요하다.
그래서 때론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신혼 초 '착한 거짓말'로 위장한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명목하에 수시로 사소한 거짓말들(그러나 너무나 금세 들켜서 나를 화나게 만드는)을 하는 남편과 참 많이 다투었다.
9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아주 가끔 너무 뻔한 거짓말을 해서 나한테 들키곤 하지만 지금은 그도 많이 투명(?)해졌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드니 때론 이렇게 유연하지 못한 내가 빡빡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남편처럼 아주 가끔은 예의상의 빈말을 해보려고 노력한다.
어제오늘 너무 투명하게 쏟아내는 딸의 대답들을 들으며 그녀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대답이 너무 귀여웠다.
언제까지나 그녀가 계속 그렇게 솔직한 대답만 하며 살 수는 없겠지만,
신뢰와 약속을 중요시하고 누구에게든 피해가 가는 거짓말만 하지 않는다면,
엄마보다는 유연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