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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그래 Jun 16. 2023

첫사랑

마시라는 차는 안 마시고

첫사랑의 의미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짝사랑을 첫사랑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학창 시절이 아닌 성인이 되어 했던 연애를 첫사랑이라 정의하기는 사람도 있듯, 본인의 인생에 가장 깊게 기억나는 사람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내게 첫사랑이라 할 수 있는 건 스물다섯의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방금 전 말했듯 각자가 생각하는 첫사랑은 다르다. 물론 초등학교 때 내 심장을 떨리게 했던 친구도 있었고, 고등학교 때 1년 가까이 첫 연애를 했던 적도, 대학교를 막 복학한 이후로는 한 친구를 꽤 오랫동안 마음 졸여가며 지독하게 짝사랑을 해본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몇 번의 짧은 만남이 있었지만 그걸 과연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은 많은 고찰 끝에 ‘내 첫사랑은 이때였구나’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차(tea)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처럼 나와 그 친구의 첫 만남은 차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군 제대 후 대학교에 복학해 나는 유도라는 운동에 흠뻑 빠져 유도부에 들어가 열심히 동아리 활동을 했다. 마치 자신이 국가대표라고 착각하는 건지 올림픽이라도 나가려는 듯 온종일 유도에 대한 생각과 훈련으로 많은 나날을 보내던 때였다.


많은 남자 복학생들이 그러하듯 연애에도 관심은 많았지만, 당시 복학하자마자 지독한 짝사랑을 1년 가까이 해왔던 터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있던 상태였고, 유도 동아리라는 주변 환경도 연애라는 단어와는 딱히 어울리지 않았다. 그곳은 덩치마저 산만 한 시커먼 남자 위주의 집단이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음과 양의 밸런스가 맞지 않는 곳에서 연애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사치였다.  물론 동아리가 연애하는 곳은 아니지만, 일단 환경이라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다른 취미를 위한 동아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학교 벽지에 붙어있는 한 포스터에 시선을 뺏겼다. 흰색 배경에 정말 심플하게 한 잔의 찻잔과 녹차를 연상시키는 연둣빛 색의 액체가 담긴 일러스트였다. 그걸 보고 ‘아 여기에 들어가야겠다’ 생각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포스터에 적힌 번호로 동아리 가입 문의까지 이어졌다. 동아리 회장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는데 멀리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실루엣이 낯설지 않았다. 흡사 유도동아리에서 자주 보이는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남자였단 말이다.


다도동아리인데 회장이 남자, 그래 뭐 충분히 그럴 순 있지만 일단 시작부터 썩 달갑지는 않았다.

‘그래 내가 차 마시러 왔지 연애하러 왔나’ 라는 되도 않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 시작해야 했다. 헛헛한 마음을 애써 꾹꾹 눌러 담으며 동아리 관련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복학생의 안목으로 보기에 회장이라는 친구는 신입생처럼 보였다. '신입생이 회장일 리는 없을텐데'라고 생각하던 찰나 군대를 아직 안 간 2학년이라며, 내 마음을 읽은 듯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이어나간 말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동아리가 잘 운영됐었으나 지금은 사람도 거의 없고, 운영이 잘 되질 않는다’고 처음 동아리에 가입하려고 들어온 사람에게 참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역시나 여기도 ‘조졌구나.’라고 생각하며 체념했다. 어찌 됐건 동아리에 들어가기로 하고 동아리 단체카톡방에 초대됐다. 동아리 단톡방에서 초대만 됐을 뿐 한 학기가 다 끝날 때까지도 동아리 모임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단톡방조차 마지막 대화가 언제였는지 모를 만큼 온기가 식어버린 느낌이었다. 그 회장 친구의 얼굴을 본 것도 동아리에 가입한 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새 학기가 시작됐다. 새로운 동아리에 들어가긴 했지만,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고 여전히 시커먼 복학생들이 있는 유도동아리에서만 어느새 부회장 자리까지 꿰차며 입지를 더욱 넓혀가고 있었다. 새 학기였으니 신규 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동아리 회장이었던 같은 과였던 친한 형과 홍보영상을 만들어 동아리 홍보에 열을 올리던 때였고, 새 학기 대면식이다 뭐다 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조용하던 다도동아리의 단톡방에 알림이 울렸다.

“O월 O일 다락방(다도 동아리) 새 학기 첫 모임이 시작되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공지를 올린 사람은 동아리를 가입한 날 나를 안내해줬던 남자 회장이 아닌 다른 이름이었다.


‘어? 회장이 바뀐 건가?’


어쨌거나 이곳도 새로 활동한다고 하니 첫 모임 일에 맞춰 가보기로 했다. 모임에 도착하니 놀라울 정도로 기존에 속해있던 유도부와는 정반대의 성비를 자랑하고 있었다. 오히려 남자가 없다시피 했다. 남자는 나를 포함하여 두 명이었다. 남자는 없고 여자가 많은 적응이 안 되는 동아리 성비에 놀라고 있을 무렵, 흰 피부에 유독 눈길이 가는 친구가 있었다. 대신 회장을 맡게 된 친구라고 했다.


알고 보니 처음 나에게 동아리 설명을 해주었던 회장은 인수인계도 없이 그 학기가 끝나고 군입대를 하여 원래 부회장이던 친구가 회장 자리를 떠맡게 된 거라 했다.


차 동아리답게 첫 모임도 간단하게 찻자리가 꾸려졌고, 차를 마시며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차를 받은 도자기 잔에 하얀 김이 올라오면 차를 마시는 척, 잔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 친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렇게 힐끗 쳐다보기 위해 찻잔을 들어 올리는 과정 덕에 첫 모임부터 차를 과다(茶)복용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순간은 마시는 게 차인지 술인지, 차에 취하는 건지 사람에게 취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대뇌의 전두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갔는데 다시 그 친구 생각이 났다. 괜히 무언가 말을 걸고 싶은데 말을 걸 구실이 없었다. 최대한 대화를 이끌어 갈 명분을 만들어 보기 위해 생각을 쥐어짜고는 카톡으로 한 마디 건넸다.


그.. 혹시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그렇게 내 첫사랑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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