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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그래 Jun 09. 2023

물 고문의 향연

물 고문이라고 들어는 봤는가? 실로 물 고문을 처음 경험해 본 것은 단연 찻자리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찻자리는 보이차를 마시기 위한 자리였는데 시선을 끈 건 단연 차 도구였다.


아이들 소꿉놀이할 것 같은 작디작은 도자기에 잔은 더 작다. 저렇게 마셔서 간에 기별은 가려나 생각하고 자리에 앉아 따라주는 대로 차를 홀짝거린다. 첫 잔을 들 때까지만 해도 차를 우리는 도자기 정도는 들고 마셔줘야 마신 느낌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내 그 생각은 쏙 들어가게 되었다.


작은 다구에 찻잎이 대체 얼마나 들어가 있는 건지, 물을 계속 따라 부어도 흑색의 찻빛은 여전했으며 옅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그렇게 몇 시간을 소꿉놀이하듯 차만 마셔댄다.


작디작은 잔을 가지고, 앉은 자리에서 1~2리터쯤은 거뜬히 해치우는 거다. 오로지 물만 마시는 거라면 진작에 물배 차서 도저히 마실 수 없는 지경의 양이겠지만 신기한 게 배가 부른듯하지만 마시는 족족 들어가게 된다. 마치 술과 같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대신 슬슬 방광이 터질듯한 느낌이 들뿐, 생각보다 배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흔히 말하는 ‘밥 먹는 배 따로 디저트 먹는 배 따로 있다’는 말 같지도 않다고 느낀 말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느낀 건 차를 접하고부터였다. 이 문장을 많이 사용했던 사람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어쨌거나 우린 이걸 물고문이라고 불렀다. 최초로 이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인가 싶을 정도로 다도 동아리에서도 티소믈리에 과정을 공부하던 때도,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찻자리에 가면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공용어로 이 단어를 썼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물고문을 당하다 보면 사람마다의 차이는 조금씩 있겠지만 찻자리에 앉고 나서 처음 화장실에 가는 시간은 그렇게 짧지 않다. 그러나 한 번 포문이 열리게 되면 갈수록 화장실을 찾게 되는 텀은 급격하게 짧아진다. 홍수라도 난 것처럼 방광이 범람하는 느낌이다. 문제는(문제라고 하긴 표현이 그렇지만) 화장실에 다녀와서 끝이 아니라 다시 앉아서 계속 마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 괜찮아졌다가 다시 마시고 화장실, 그리고 다시 괜찮아졌다가 계속 마시기를 반복하는 자발적인 고문인 것이다. 차를 통해 우리는 마침내 채움과 비움의 미학을 실현한다.


다시 자리에 앉으면 차를 우리는 자사호(*중국 차도구)에도 새롭게 뜨거운 물이 들어가고 얼마 되지도 않아 작은 잔에 차가 따라진다. 강요하는 사람은 없지만 잔이 채워짐과 동시에 기계적으로 잔은 입술로 향한다. 흡사 뫼비우스의 띠다. 끊어지지 않고 무한 반복이 일어나는 이 현장은 인터스텔라처럼 시공간마저 넘나드는 느낌이다. 실제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대화가 오가기는 한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액체를 집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화장실을 자꾸 들락날락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작은 도자기 찻잔에 따라진 차를 조심스레 호로록, 홀짝 하는 기분이 좋다. 그저 이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생각은 들지 않고, 몸도 마음도 편하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선은 주변의 차 도구들로 향하는데, 다시 눈길을 둔 찻잔의 모습도 슬슬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처음 봤을 땐 소꿉장난도 아니고 뭐 이리 작은 주전자와 잔이 있나 했는데 마시다 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차가 가장 맛있는 적당한 온도에서 호록-하고 한두 입에 마시기 좋은 양, 그리고 찻잔 가장자리의 얇디얇은 두께는 찻잔을 입술에 댔을 때 기분 좋게 차 맛을 온전히 전해주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고 한 차례 더 감동한다.


고개를 잠시 들었다가, 또 한 번 호올-짝. 홀짝, 홀 짝.


그렇게 차를 따라주는 족족 한두 잔씩 거듭 마시다 보면 혈중 찻물 지수가 증가하게 되는데, 그 증상으로는 몸이 축 처지는 것이다. 축 처진다는 말보다 푹 퍼진다는 말이 조금 더 어울릴 듯하다. 좋게 말하면 차를 통한 몸과 마음의 이완, 적나라하게 말하면 차에 취하는 느낌이다. 알코올 한 방울 안 섞였지만, 몸이 축 늘어지는 느낌이 술에 취해 늘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적당히 마시면 그럴 일은 없지만 사람마다 적당한 기준은 다르며, 술이나 차나 적당히 마신다는 것도 생각보다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차에 취한다는 느낌이 나만 느끼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실제로 차에도 취한다는 표현이 있었다. 차취라고 부른다. 이 또한 주량처럼 사람마다 차량이 다른데, 본인의 차량을 넘어서게 되면 기분 좋은 이완을 넘어 땅 속으로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 차에서 깨는 명약이 있다. 그건 바로 술이다. 차취를 깰 수 있는 특효는 술을 마시는 거다. 차로 인해 몸이 축 처질 정도로 이완됐을 때 몸을 깨워주는 건 신기하게도 시원한 술 한잔이다. 그럴 때는 다른 술들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위스키를 탄 하이볼이나 스파클링감이 있는 샴페인 혹은 전통주 종류가 좋았다. 그렇게 술로 몸을 간단하게 깨운 뒤 다시 본격적인 술자리, 아니 찻자리가 시작된다.


그렇게 신나게 또 술을 마시다가 취기가 돌면, 술을 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연 다시 차를 마시는 거다. 이 또한 뫼비우스의 띠다. 이제는 깼다가 마셨다가, 마셨다가 깨기를 반복하는 찻자리와 술자리의 반복이다. 서로 취하게 하고, 다시 깨워주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현상인가. 그 가운데 끝없는 물 고문이 이어지는 거다.


이렇게 찻자리 같은 술자리 혹은 술자리 같은 찻자리를 즐기다 보면 화장실을 드나드는 텀과 함께 밤도 매우 짧아진다. 어쩌면 수명도 짧아질 수 있으니, 술은 조금 자제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그건 알면서도 이 맛에 빠지게 되면 사실 헤어 나오기가 쉽지는 않다. 자제는 하되 모든 사람이 이걸 꼭 경험해 보길 바라는 바다.


차는 결코 어렵지 않다. 물 고문을 경험해 보겠다는 마음가짐 하나면 충분하다. 준비가 되었다면 물 고문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앞으로 훨씬 더 다채롭고 향긋한 삶이 될 것이라 장담한다.



 (*실제로 찻잎에 들어있는 각종 아미노산[아스파라긴산과 알라닌]과 비타민[C] 성분은 알콜 분해 효소의 작용을 증가시켜 알콜 분해가 빨라지고, 카페인의 이뇨작용으로 알콜을 빨리 배설하게 하여 숙취 해소에도 도움이 됩니다..)




구독자분들께 너무나도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게 됐네요. 이렇게 오랜기간 업로드를 쉬게 될 줄은 저조차 몰랐습니다. 작년에는 무려 일주일에 하나씩 글을 올렸는데, 어느순간부터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렸는지 도저히 글에 손이 가질 않더라구요.


브런치에 업로드 된 마지막 글을 확인해보니 작년 시월을 끝으로 무려 반년이 훌쩍 넘었더라구요. 그간 많은 일이 있었는데요.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겪으며 잘 버티어 가는 중입니다. 약간의 변명을 해보자면 작년 시월에 사무실을 계약하고 얼마 있지 않아 좋지 않은 일이 생겨 서너달은 마음을 다잡는 데에 시간을 쓴 것 같아요. 그렇게 돈도 버는 것 없이 열심히 월세로 빠져나갔구요.


그렇게 올해 초까지는 글에 손도 못 대다가 2월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에야 다시 글을 쓰게 된 것 같은데요. 글을 꽤나 쌓아두고도 다시 브런치에 올릴 생각은 못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아무도 저를 신경 안 쓴다는 건 알고있지만, 구독자분들이 늘어날수록 부담이 됐던건지 글이 안 써지기 시작한 후로는 한 번 글 올릴 시기를 놓치니 다시 글을 올린다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당연히도 글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자 구독을 취소하신 독자님들도 많았습니다. 제 탓이죠ㅎㅎ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독자분들이 빠져나가는 걸 보고있었음에도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글이 써지지가 않았거든요. 반면에 글이 오랜시간 올라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독 취소를 하지 않고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겠지만요. 그리고 간혹 댓글로 걱정해주시는 독자님들도 있었고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반대로 저 또한 활동을 못하다보니 연락드리고 싶었던 작가님 몇 분은 브런치를 탈퇴하셨는지 찾기힘든 분도 계셔서 마음이 쓰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다시 글을 올리게 됐지만 지난 해처럼 일주일마다 한 편씩 꾸준히 올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해보려 합니다. 이전에 썼던 차 시리즈와는 조금은 다른 결의 문체와 내용으로 글을 써보고 있습니다. 이번 글은 출판이라는 나름의 큰 목표를 가지고, 출판사에 투고하기 위해 공개하지 않고 혼자서만 쓰고 있던 글인데요. 그러다 문득, 책이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솔직히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데) 부족한 글이라도 사람들에게 먼저 읽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완전하진 않더라도 쌓아놨던 글을 조금씩 풀어보려 합니다.

 

차를 시작하려는 분들께 보다 쉽고 재밌게 차 이야기를 전달하려다보니 차 이야기를 과감히,, 뺐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차 효능이 어쩌구 저쩌구, 맛이 어쩌구 향이 저쩌구 하는 글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니 목표한대로 올드하거나 어렵다는 느낌은 주지 않고 잘 가고 있는 듯해요. 그럼에도 이건 아무튼, 차 이야기니까요. 차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은 없을 수 있지만(그건 이제 챗GPT에게 맡기겠습니다)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차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예요.


차에 빠진 사람이 쓰는 차 빠진 차 책입니다. 이 책으로 인해 차가 커피의 차선책이 아닌 음료의 최선책이 될 날이 오길 바랍니다.




(언제 다시 수정될 지 모르는) 대략적인 목차를 소개해드릴게요.


-프롤로그

-물고문의 향연

-첫사랑

-산업 스파이

-곡차를 아십니까?

-무한 리필까진 아니더라도

-오히려 힙해

-나의 자기를 찾아서

-초록을우리는우리는

-가베차의 첫 기억

-차가 약은 아니지만

-쌍화차

-에필로그


프롤로그는 생략하고 물고문의 향연이라는 첫 본문으로 보여드렸습니다. 빠른 시일내에 다음 장인 '첫사랑' 글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간 응원해주신 독자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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