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의 <모월모일> 독후감
일주일은 언제 시작할까? 달력에 나온 것처럼 일요일? 아니면 다시 출근을 시작하는 월요일? 나는 매주 월요일 10시에 일주일이 시작된다. 내가 항상 챙겨보는 웹툰이 그때 업로드되어서다. 아비무쌍이란 웹툰인데 자신이 잠재력이 엄청난 고수인 줄 모르는 문지기가 주인공이다. 아내 없이 홀로 세쌍둥이와 같이 성장하는 걸 보려고 일주일을 기다린다.
요즘 일주일이 돌아오는 속도가 빨라졌다. 분명 지난 회차를 본지 2~3일 지난 것 같은데 벌써 새로운 회차다. 마지막에 아슬아슬하게 잘려 궁금했던 내용을 볼 수 있어 속으로 좋아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씁쓸해진다. 새로운 회차가 빨리 돌아오는 것만큼 시간도 빨리 가고 시간이 빨리 가는 것만큼 기억에 남는 일이 성글어지는 것이니까. 기억이 비는 만큼 시간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이러다 일주일, 일 년, 십 년이 금세 오고 가며 반복되면 어떡하지? 조금 더 생각해본다. 인생 자체가 금세 가면 어떡하지? 그리고 무엇이 금세 오며 반복되지?
니체를 떠올린다. 니체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반복의 범위를 제시한 이다. 삶 자체의 반복. 니체는 지금 순간이 과거에 수백, 수천만 번 반복되었고 미래에도 수백, 수천만 번 반복되는 가설을 세웠다. 이름하여 영원회귀. 영혼회귀 아니다. 영원회귀다. 영원히 되돌아오는 지긋지긋한 똑같은 삶. 영원회귀에는 변주가 없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멍청한 짓을 하고 똑같이 이불킥을 한다. 평생 겪었던 영광과 굴욕을 다시 겪을 것이고 순간 겪었던 고통은 결코 순간이 아니라 영원이 될 것이다. 수없이 반복될 것이므로.
만약 지금 삶이 끝나고 오는 게 지금 삶이라면 나는 받아들일 것인가. 글을 쓰는 이 순간? 무한히 반복해도 좋다. 오늘 출근해서 퇴근까지 했던 일도 무한히 반복해도 좋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 이것도 좋다. 만남, 이별 모두 소중하다. 새로운 걸 시작하기 전에 두려워 벌벌 떨었던 순간? 사실 설레서 떨었던 것이었다. 좋다. 키우던 강아지가 내 실수로 죽게 되었을 때? 이건 쉽게 좋다고 말할 수 없다. 2시간 동안 엉엉 울 정도로 슬펐으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울 일은 없겠지. 그럼 싫은 걸까? 그것도 아니다. 애매하다. 조용히 <철학자와 늑대>를 꺼내 든다.
작가는 자기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 11년 동안 같이 살았던 늑대가 죽어 장례를 치를 때라고 한다. 혹시 최악을 최고로 잘못 본 건가? 다시 보았지만 최고라 쓰여있다. 개가 아니라 늑대라 최악의 순간만 있던 건 아닐까? 아니다. 늑대개인 줄 알고 속아서 입양한 때와 해변에서 같이 조깅한 때를 떠올리며 작가는 행복해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추억이 아닌 암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자기의 늑대를 안락사시키고 돌무덤을 만들어주는 때를 최고라 꼽았다. “더는 나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고 희망도 없을 때 비로소 우리의 최상에 도달한다”라고 하면서. 그리고 이 순간에 “내가 누구인지 정의해 주”며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아마 작가는 자기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 해도 좋고 더 아픈 순간이 찾아와도 다시 한번 더! 라고 외칠 것이다.
소중한 이가 죽는 순간이 최고의 순간이라니. 최고의 순간이라면 자기가 정말 오랫동안 원하던 것을 이뤘을 때가 아니었나. 이성에게 고백했는데 받아들여질 때, 예쁜 아이가 태어날 때, 오래 고생하다 드디어 사업 성공할 때. 이런 게 아니었나. 작가에게 자기 늑대가 죽는 순간이 최고라면 내게도 강아지가 죽는 순간이 최고가 될 수 있다. 다시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때가 내 최악의 순간이었을까? 아니다. 최악은 아니었다. 소중했다. 소중한 걸 잃어서 내게 정말 소중했다는 걸 알았다. 2시간 동안 주저앉아 울다 정신을 차리고 이제는 보내줘야겠다 했을 때 마음이 굳건해졌다는 걸 알았다. 밤비가 내리는 뒷산에서 하얀 천으로 차가운 몸을 돌돌 만 후 구덩이에 편하게 뉜 후 잠시 바라보며 너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조심스레 흙을 덮고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으며 그래도 나는 살아나갈 거라는 걸 알았다. 이런 순간이 내가 누구인지 정의해 주며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최고의 순간일까? 생각해보았지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최악의 순간은 아니란 건 알겠다.
시간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나뉜다. 크로노스는 연월일시처럼 누구나 느끼고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적절한 때 이자 기회, 결단의 시간이다. 의미가 부여된 시간이다. 우리는 크로노스를 따라 살아가지만, 진정으로 살아있는 시간은 카이로스이다. 기억되는 건 카이로스이기에.
그러므로 최악의 순간은 최고로 고통받거나 슬픈 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가 아닌 시간이지 않을까? 소중한 이가 죽는 순간을 떠올리는 건 힘들지만 동시에 행복하기도 하다. 비행기의 발명이 추락의 발명이듯 죽음을 떠올리는 건 역설적으로 삶을 떠올리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 안에서 소중한 이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소중한 이가 진정 죽을 때는 우리가 잊을 때다. 내 안에서 잠시 살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잊힘의 순간.
잊히지 않고 계속 살아있을 수 있다면 강아지가 죽는 순간을 영원히 반복해도 된다. 어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잊히는 게 견딜 수 없을 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잊히는 다른 순간이 신경 쓰인다. 내 일주일을 알차게 채워줄 수 있었던 순간. 그랬다면 일주일이 꽤 길게 느껴졌겠지. 잊히는 순간을 잡기 위해 <모월모일>을 꺼내 든다.
“서쪽은 기울어가는 것들이 마지막을 기대는 곳이”라고 하고 “여자에게 있어 하이힐은 남자를 겨냥한 총, 절박함이 장전된 총”이라 했던 시인. 그 시인이 “빛나지 못한 순간들, 그 시간에 깃든 범상한 일들과 마음의 무늬를 관찰”한 결과를 기록한 책이다. 겨울, 봄, 여름, 가을 순으로 꼬박 잊혀질 1년이 빼곡히 들어있다. 시인이 카이로스로 살아낸 1년은 이 책으로 영원회귀 되어있다. 카이로스로 채워져 기꺼이 영원회귀할 수 있는 단서를 책에서 찾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