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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집증후군 Sep 14. 2020

갈증 리뷰 - 가족은 지옥인가?

나카시마 테츠야 03


시대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건 보는 자의 정신이 혼란하기 때문이다. - 장 콕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크리스마스이브. 예배를 올리는 단란한 가족들의 모습과 파티를 즐기는 화려한 클럽이 겹친다. 클럽에서 만난 남녀는 호텔 방으로 사라지고, 욕을 내뱉는 남자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다. 곧이어 교차되는 건 8개월 후의 장면, 호텔에서 구강성교를 받으며 환희에 빠진 표정을 짓던 남자는 편의점에서 칼에 찔려 죽는다. 다른 두 명의 남녀가 같이 살해당한다. 그들의 시체를 발견한 건 전직 경찰이자 현재 경비 일을 하고 있는 아키카주(야쿠쇼 코지), 8개월 전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 차로 들이받았던 바로 그 남자다. 시작하자마자 피가 튀기는 이 영화가 어지럽고 불쾌해 보이는 건 정말 우리의 정신이 어지럽고 불쾌하기 때문일까,라고 예전엔 생각했지만 이젠 이 말이 가리키는 '보는 자'라는 것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 같다.



떨어진 구멍이 너무 깊어, 계속 떨어지고 있는 이야기


의문의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된 아키카주에게 전 부인의 전화가 걸려온다. 딸 카나코(고마츠 나나)가 사라졌다. 카나코의 가방에서는 마약이 발견된다. 아키카주는 부인의 부탁을 받아 카나코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딸의 행적을 쫓아가면 갈수록 그는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던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전 부인을 잠든 사이 강간하고 사랑한다고 외치는, 딸을 찾는 동안 다른 자식의 부모에게는 자식을 잘못 키웠다며 폭행하는 이 남자는 쓰레기다. 이런 쓰레기 같은 남자를 뒤로하고 영화는 또래애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는 '나'(시미즈 히로야)를 비춰준다. 자신을 구해주는 카나코를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라고 표현한다. 쓰레기 같은 아버지와 부서질 듯 연약한 '나'는 점차 깨닫게 된다. 카나코는 결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녀는 악마와 다름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 나오는 야쿠자들과 비리 경찰들은 '규칙'을 강조한다. 반면 카나코에게는 '규칙'이 없다. 카나코를 찾아 나서는 아키카주를 폭행하며 야쿠자는 말한다. 카나코는 너무 자유롭다고. 카나코에게 이 모든 일은 장난처럼 보인다. '꿈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져도 상관없으니까.' 아키카주가 영화 초반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받으며 징후를 보였듯 카나코 역시 정신병적 징후가 눈에 띈다. 오가타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마약을 먹이고 남자들에게 강간을 당하게 만든 뒤 죽게 만들고 옛 은사의 어린 딸을 원조교제에 빠트린다. 그들의 성관계 사진을 찍고 그것을 관련 인물들에게 모두 퍼트린다. 경찰의 고위 공직자와 의사, 부호, 야쿠자들의 치부가 담겨있는 그 사진을 감추기 위해 그들은 카나코를 쫓는다. 카나코의 행동에는 목적이 없다. 영화 내내 카나코를 감싸는 청량한 화면은 결코 허울 좋은 껍데기가 아니다. 카나코는 순수한 악 그 자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악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떨어진 구멍이 너무 깊어, 계속 떨어지고 있는 이야기(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 카나코는 주위 모두를 구멍 속으로 끌어들인다.

영화 내내 아키카주와 야쿠자, 경찰들은 피를 튀기며 카나코를 찾지만 정작 카나코는 이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죽은 뒤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카나코가 원조교제에 빠트린 중학생 아이의 어머니이자 옛 은사인 리에(나카타니 미키)는 카나코의 조롱을 참지 못하고 드라이버로 찔러 죽인다. 카나코는 산에 묻히고,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내린 눈이 산을 덮는다.



나의 피가 섞여있는 


아키카주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영화 초반, 카나코의 행방을 조사하면서 약쟁이들과 야쿠자들에게서 카나코는 절대 그럴 리 없다며 구분하지만 점점 사실이 밝혀지자 괴로워하기는 커녕 기뻐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들을 모두 짓밟고 파괴하는 꿈을 꾼다고 정신과 의사에게 고백하는 아키카주는 카나코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자신의 핏줄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결국 카나코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리에에게 하얀 눈밭에서 시체를 파도록 협박하는 것 역시 아버지로서 직접 자식을 처벌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자기 파괴적인 아키카주의 행동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아이카와(오다기리 조)와의 결투에서 절정에 이른다. 카나코가 손을 잡은 조라는 사업가의 청부살인을 하고 있는 아이카와는 망가진 아키카주와 달리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아키카주는 아이카와의 집에 침입해 그의 아내를 강간하고 인질로 삼는다. 영화 내내 아키카주의 환각으로 작용하던 아파트의 광고(다정한 아내와 딸의 모습)의 이미지가 그의 손에 의해서 파괴되는 장면이다.


결국 카나코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아키카주는 리에와 함께 온통 하얗게 눈으로 가득 차있는 산을 파헤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이미지이다. 카나코가 묻힌 눈을 파헤치면서 아키카주는 말한다. '내가 살아있으면 그 아이도 살아있어' '그 아이는 나야' '내가 내 손으로 그 아이를 제대로 죽여버릴 거야' 온통 피로 물들었던 영화의 결말은 하얀 눈으로 덮인다.


제정신인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고 시체와 피가 난무하는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정신건강이 멀쩡할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안심해도 좋다. 이 영화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건 당신의 정신이 혼란스럽기 때문이 아니니. 정신이 혼란스러운 건 이 영화의 등장인물이고 우리는 그 지옥을 한발 떨어져서 목격했으니까. 다행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줄평 : ★★★, 가족은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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