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시마 테츠야의 7번째 장편영화, 2010년작 고백은 동명의 미나토 가나에의 장편소설이 원작이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이 우리 반에 있습니다'라는 캐치프라이즈이자 작중의 대사로 유명한 이 소설은 미나토 가나에가 「성직자」로 발표한 데뷔작을 장편소설로 늘린 작품이다. 그러니까 「성직자」의 결말은 유코(마츠 다카코)가 딸의 죽음에 대한 내막을 밝히고 범인들이 방금 먹은 우유에 에이즈 환자인 남편의 피를 넣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성직자」는 독립된 단편으로서의 완결성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뒤에 이어지는 다른 단편들 같은 경우 「성직자」에 비해 완성도가 조금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백』은 상당히 훌륭한 작품이다.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카키바라 사건,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모녀 살인사건)을 언급하면서 사회파 미스터리로서의 장점을 과시하고 이어지는 등장인물들의 독백과 유코의 복수는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 원작을 나카시마 테츠야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의 대답은 이렇다. "영화는 엔터테인먼트다!"
보고 듣는 것의 거리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비평(내가 하는 것이 비평이라면),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잘 못 느끼겠다. 이 영화는 장르영화로서 굉장히 훌륭한 영화이고 소기의 목적들을 달성했다. 소년법의 실효성? 사적 복수의 정당성? 청소년들의 비행원인? 작품이 던지는 질문들이 지금 이 순간 유효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아니지만 이런 질문들은 너무나도 많이, 소모적으로 논의되어 왔고 그런 질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면 더 좋은 작품들이 존재한다. 감독 역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수용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06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감독은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스크린에 자신의 철학을 담았을 뿐이다. 나는 그 방식대로 영화를 충분히 즐겼고 그것에 대해 더 말하고 싶다.
시끄러운 영화가 있다. 보통 액션 영화나 블록버스터 영화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방식인데 시종일관 음악이 흐르고 무엇인가 폭발하고 정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소음을 소음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계속되는 소음 속에서 익숙해지게 된다. 관객에게 더 이상 소리는 자극을 줄 수 없다. 음악과 효과음은 적절하게 사용되면 영화의 몰입감을 높여주며 감상을 극대화시키지만 남용되면 효과가 줄어든다. "사람들은 당신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러니 문제는, 당신이 뭘 '안 하는가'죠. 당신이 뭘 하는가가 아니고요." 데이비드 핀처의 말이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이 안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웬만하면' 음악을 멈추지 않는다. 방금 소음이 계속되면 소리에 자극을 느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끝까지 들어달라. 나카시마 테츠야의 방법론은 일반적인(일반적인 이라는 말이 조금 웃기지만) 작가주의 감독들의 방식과 조금 다르다. 오히려 상업영화와 더 가깝달까. 다만 극단에 치우칠 뿐. 굳이 비슷한 감독을 찾는다면 쿠엔틴 타란티노를 들 수 있달까. 이쯤 되면 무언가 짐작이 되지 않는가?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음악을 아주 잘 고르는 감독이다. 조금 유명한 곡인 Radiohead의 Last Flowers부터 클라이맥스에 흐르는 Boris의 Farewell, 그리고 기타 다른 곡들을 들어보면 이 감독이 음악을 얼마나 다양하게 듣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의 영화에는 장면별로 그 장면을 살려주는 음악들이 삽입되고 이는 그 장면의 장점을 극대화시킨다. 흔히 마블 영화나 요즘 영화들에서 보이는 천편일률적인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아니다. 작품 초반 슈야(니시이 유키토)와 나오키(후지와라 카오루)가 왕따를 당하는 상황에서 들리는 이 흥겨운 음악을 들어보아라. 장면과 음악의 전형성을 벗어나는 것이 바로 나카시마 테츠야의 방식이다. 그리고 이는 음악이 멈추었을 때 효과를 더 극대화시킨다. 흐르던 음악이 멈추고 갑자기 정적이 찾아온다. 관객들은 그 순간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어떤 장면이든 롱테이크로 찍지 않는다. 롱테이크로 유명한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그래비티, 버드맨, 1917, 칠드런 오브 맨, 공교롭게도 1917(로저 디킨스)을 제외하면 모두 엠마누엘 루베즈키가 촬영감독을 맡은 영화들이지만 이런 영화들의 공통점, 그리고 롱테이크가 주는 장점은 무엇일까. 롱테이크의 카메라는 1인칭이든 3인칭이든 주로 한 등장인물들을 따라가는데 이는 관객을 인물 그리고 장면에 몰입시키게 만든다. 거리두기로 보자면 관객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하지만 테츠야 감독의 카메라는 다르다. 그의 편집은 짧은 컷의 연속이고 수많은 각도로 인물들을 보여준다. 거기에 과장된, 희화화되었다고 할 수도 있는 연출까지. 관객은 이때 한발 물러서게 된다. 자, 편집은 화려하고 음악은 흥겹고 관객들은 한발 물러섰다. 이제 이 지옥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은 피의 문제
"너에게는 나의 피가 흐르고 있어"
어린 슈야를 학대하다 결국 이혼을 하고 떠나는 슈야의 어머니는 말한다. 결국 슈야는 그 말을 안고 자신은 어머니처럼 명석하고 남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일 수 있는 대사이다. 유코(마츠 다카코)의 딸, 마나미(아시다 마나)를 죽인 두 범인 슈야와 나오키 모두 본의는 아닐지라도 스스로의 어머니를 죽인다. 슈야는 폭탄으로, 나오키는 어머니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식칼로. 그들을 적시는 것은 자신 혹은 친족의 피. '장난이야(なんてね)'라고 무마할 수 없는 이 지옥은 장난이 아니고 지극히 존재하는 실제이다. 『고백』의 가족은 서로의 피로 물들어있다. 슈야가 만든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그 어떤 후회와 참회도 현실을 돌이킬 수는 없다. 자식의 시체를 파헤치는 고통(『갈증 』) 끝에 이해만이 가능할 뿐이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여교사가 어린 소년에 대해 가진 감정은 사실 ‘증오’보다 ‘사랑’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소름이 돋는다. 유코는 슈야에게 (어머니로서의) 벌을 준 것이다.
한줄평 : ★★★★.5
ps. 어쩌다 보니 감독론...? 비슷한 게 되어버렸는데 진짜 별로 할 말이 없다... 있어도 의미도 없고... 다음은 갈증이나 마츠코 일 거 같은데 한번 다른 감독으로 쉬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쉬어간다고 했지 보기 편한 영화라고는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