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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집증후군 Sep 15. 2020

『프라이데이 블랙』- 이미 가능한 미래에서

나나 크와메 아제-브레냐, 『프라이데이 블랙』 서평


본래 SF소설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멀게만 느껴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첨단 과학기술이 등장하고 안드로이드가 반란을 일으키고 외계인이 우주를 침공하는 이야기.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 향유하던 SF소설들이 바라본 시대에 우리는 이미 도착했다는 것이다. 1982년에 만들어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대표적이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1968)』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의 배경은 2019년이다. 다행히도(?) 인류는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데 성공하지도 못했고 미세먼지 농도는 가끔 천정부지로 치솟지만 영화에서처럼 시종일관 스모그로 가득 차 있지는 않다. 덕분에 멸망하지 않은 인류는 후속편으로 2049년이라는 아직 도달하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목적지로 존재하는 시간대


그러나 근래의 등장하고 있는 SF작품들이 바라보는 시간대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SF 드라마 <이어즈&이어즈>를 보면서 열광했던 이유는 이 작품이 하이테크놀로지적이고 미래다운 영상미를 뽐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작품이 바라보는 근미래(작품의 시작은 2019년)가 어디까지나 '있을법한'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임기 마지막 날 중국의 인공섬 훙샤다오에 핵폭탄을 날리며 시작되는 이 드라마의 디스토피아는 우리에게 어떤 설득력을 안겨준다. 점차 우경화되고 있는 정치인들과 국민들, 그들의 포퓰리즘과 반지성주의, 코앞에 다가온 환경문제, 그리고 난민들과 전염병 문제까지. 이 드라마가 다루는 미래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미 도달한, 목적지로 존재하는 시간대를 겨누고 있다.

나나 크와메 아제-브레냐의 소설 『프라이데이 블랙』이 바라보는 미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핀컬스틴의 5인」,「그 시대」 ,「지머랜드」,「프라이데이 블랙」. 이 네 작품이 다루고 있는 시간대는 거울처럼 우리를 비춘다. 왼손과 오른손이 뒤바뀐 채로, 끝날 수 없는 가위바위보를 계속하며. 어느 쪽도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한 디스토피아


미국이라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펼쳐지는 이 디스토피아는 '자유'롭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소설의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간군상들은 공통적으로 욕구를 참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지 '못한다'가 아니라 '않는다'일 것이다. 이들의 분출은 누군가에 의해서 허용되어 있으며 그것은 자유로운 행위이고 막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다섯명의 흑인 청년들을 참수했다는 백인 남자의 사건을 다룬 「핀컬스틴의 5인」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감정이 배제된 철저히 '이성적'인 아이가 태어나는 「그 시대」를 거쳐 「지머랜드」에 도달한다.

폭력에 대한 욕구를 분출시켜주는 것을 도와주는 시뮬레이션 체험장에서 손님들은 흑인인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 매번 그곳을 방문하고 이는 매우 건전하고 교육적인 일로 여겨진다. 체험장은 손님에게 더 폭력적인 선택지를 강요하고 이는 오락거리처럼 그들에 의해서 소비된다. 개인의 폭력에 대한 욕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제한하지 않는 소설의 세계에서 주인공들은 선택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는 것. 소설의 끝까지 비명을 지르면서도 공고한 체제를 거부하는 주인공들은 끝까지 행위한다.

「프라이데이 블랙」은 그야말로 물질적인 것의 지옥이다. 물건을 사기 위해 몰려오는 인파는 조지 로메로의 영화 <시체들의 새벽>에 등장하는 쇼핑몰에 몰려오는 좀비들과 다름없다. 실제로 그들은 물건을 사는 동안 점차 언어를 잃고 자신을 막는 것이라면 어린아이든 점원이든 간에 짓밟고 죽이려 든다. 이 과정에서 생긴 시체들은 점원들에 의해서 의레 있는 일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치워진다. 지금이 아니면 사지 못할 TV를 산 여자는 피에 젖어 밥을 먹으면서 이날 죽은 아이와 남편이 약하기 때문에 죽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바통터치를 하는 것처럼

흘러넘치는 욕망들 사이에서, 폭력을 용인해주는 체제 속에서 작가는 나이브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행하는 반항과 행위들에는 이미 한번 졌다는 패배감마저 깃들어 있다. 그러나 그래서 가능한 미래가 있다. 바통터치를 하는 것처럼 다음으로 패배하는 주인공을 만날 때마다 우리에게 깃드는 끈질긴 생명력이 존재한다. 이윽고 하나 둘, 비명이 모여 함성이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 이 글은 출판사 엘리로부터 가제본을 받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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