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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moomo Dec 26. 2024

형님 생일,

솔직해서 찌질한 고백


  오늘은 형님의 생일이다. 며칠 전 발목 부위에 큰 수술을 하고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 계신 친정아버지 병문안을 가는 차 안에서 나는 형님께 ‘생일축하드려요’ 문자와 함께 그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요즘 유행하는 컬러의 샤넬 립스틱을 선물로 보냈다. 몇 개월 전 며느리를 맞은 형님은 남편보다 열한 살 위 누나이다. 말이 누나지 나이차가 많이 나 ‘내가 쟤 업어 키웠어’ 얘기를 많이 듣기도 했고, 형님은 시댁에서 맏이고 가족들이 의지를 많이 했던 탓에 누나 이상의 존재였다. 솔직히는 ‘나는 시어머니가 두 명이야’ 할 정도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지금에서는 정말, 더 그런 느낌도 없지 않다. (남편이 의지해 고마운 만큼 부담을 주었고 나는 받는다. )


 결혼 후, 시댁을 자주 다녔다. 처음엔 2주에 한 번씩, 그러다가 조금씩 간격이 길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오라시면 빼지 않고 다녔다. 어머니는 가족이 함께 모여 밥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었고 그러다 보니 우리가 가면 ‘형한테 연락해 봐라, 누나한테 연락해 봐라.‘ 하며 온 가족을 호출했다. 친정이 먼 나는 친정 근처에 사는 형님과 자주 보았고 그게 꼭 좋지만은 않았다. 특히 명절마다 만나는 것은 솔직히 큰 스트레스였다. 생전에 시부모님이 형님네 가족과 명절 점심식사를 해야만 친정에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친청이 멀어 차로 대여섯 시간을 가야 하는 나로서는 명절날 형님네랑 식사하고 설거지 마치고 후식으로 과일까지 내어놓아야만 떠날 수 있는 처지인 것이 스스로 딱하게 여겨졌다. ‘너도 얼른 가야지’ 한 마디만 보태어주면 될걸… 하고 속으로 많이 야속해했다. ’자주 보는 사이니 명절엔 안 봐도 돼 ‘ 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수저 놓자마자 가라시면 어디가 덧나나 싶었다. 오히려 본인들 약속 있다며 혹은 쉬러 집에 간다며 먼저 일어나기도 부지기수였다. 멍한 얼굴로 형님네 배웅하고 아쉬워하시는 시부모님께 죄송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느지막이 차를 타고 출발하면서 (딸 셋 시집보낸 후로는 내내) 기다리는 게 일인 친정부모님께, ‘저녁 먼저 드세요. 저희는 한밤중에 도착해요’하고 전화를 드리곤 했다. 왠지 슬프고 억울한 맘이 들었지만 장거리 운전에 이미 피곤한 남편 옆자리에서 섭섭한 기색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친정에 가주니 고마워해야 할 지경…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받지는 못했다. 남편이 시댁일에 혹은 회사일에 ‘어쩔 수 없잖아’하면 정말 다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나는 친정 일에 혹은

아이들 일에 그렇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뭐랄까, 인생을 참 힘들게 사셨다. 자식들이 다 알정도로 고생을 많이 하셨고 그래서 더 사랑했고 감사했고 보살펴야 했다.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나도 부모님이 그러라 하셔서 시댁에 늘 더 잘하고픈 마음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는 한없이 애달프고 여린 어머니였겠지만 집안의 하나뿐인 며느리인 나에게는 아니었다. 다정한 고부사이를 꿈꾸었던 것은 내가 무척 순진했기 때문이구나! 깨닫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뭐라도 섭섭한 게 있으면 형님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하셨고, 나는 형님의 연락을 받고 다시 어머니께 연락을 드려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런 전화를 처음 받은 날, 형님은 나를 ‘올케!’라고 불렀다. 사실 막 결혼했을 때 남자형제만 있는 형님은 언니도 여동생도 있는 내가 부럽다시며 ‘언니라고 불러~‘ 하고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셨다. 순진하게도 나는 언니가 한 명 더 생겼구나 했었다. 늘 내 편인 나의 언니처럼 말이다. ‘올케 네가 그랬다며? 얼른 엄마께 사과드려 ‘ 이런 전화를 받은 이후로 나는 깍듯하게 ‘형님!’이란 호칭을 버린 적이 없다. 고마운 일도 종종 있었지만, 이미 우리 사이에 생긴 선이 지금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관계란 정말 쉽지 않다. 마음을 주고받는 것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내 편에서만 섭섭하면 상대를 탓하겠으나 상대도 나 때문에 섭섭하다고 하니 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한 인간의 품성을 넘어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이 따로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한다.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시댁 가족들은 명절에, 부모님 기일이, 어버이날에 그리고 어쩌다 생일이나 특별한 일에 모이게 되었다. 최근 첫째 시조카가 조금 이른 결혼을 하며 형님은 며느리를 맞이했다. 얼굴이며 마음씨 모두 어여쁘고 참한 아이가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결혼 전 인사하는 자리에서 보고, 명절에 보고, 결혼식날 보고 신행 후에 다시 만났다. 잦은 만남에 조카며느리가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은 나의 기우인 듯 싹싹하고 해맑은 표정이 그맘때의 나와는 사뭇 달랐다. (매사에 신중하고 생각이 너무 많은 내가 문제였던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보다 더 오래된 가족인 듯 잘 섞여있는 어린 그 아이를 보며 이상한 질투심이 일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가족이라 부르지만 어떤 일엔 제외되던 나, 노동에는 일등으로 동원되던 나… 여전히 이방인 같은 나, 혼자서만 멀뚱하게 소외감을 느끼던 나, 그런 나와는 다르게 잘 웃고 잘 받아치고 가족들 한가운데 앉아있었다. 그 와중에 남편마저 엉뚱한 농담을 건네며 새로운 가족에게 친밀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 같고 남사스럽고 남루한 기분이 되었다.


 집안에 며느리라는 존재가 하나 더 생긴다는 사실에 처음엔 나도 모르게 동지애를 가졌다. 마음을 알아주고 챙겨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느낀 어느 순간, 모지리 같은 마음이 올라왔다. ‘그래  얼마나 잘하나 보자. 이기적인 며느리를 봐야 내가 귀한 줄 알지 ‘ 같은 하찮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누나로서는 나이가 많았지만 시엄마로서는 젊은 형님이 며느리를 정말 이뻐했다. 함께 *인생네컷도 찍고 예쁜 카페도 가며 데이트를 했다. 내가 그토록 꿈꾸던 다정한 고부의 모습이었다. 신행 갈 때는 눈물도 보이며 ‘우리 이쁜 며느리 사랑해’ 하는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었다. 슬펐다. 난 더 노력해도 받을 수 없는 사랑이어서 슬펐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어도 여전히 못 받을 사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슬펐다.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며느리가 오늘 형님 생일에 생일상을 차려주었다며, 가족단톡방에 사진이 올라왔다. 내가 아직 확인하기 전에 남편이 먼저 알려주었다.

 ‘ㅇㅇ이가 누나 생일상 차려줬네, 사진 봐! 우와.‘

 보기 싫었다. 궁금해도 안 궁금했다. 아니 사실,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예쁘고 착한 아이가 얼마나 정성으로 준비했을까! 결혼하고 처음 맞은 시엄마 생신에 (내가 그랬듯) 그 기특한 마음을 가득 썼을 것이다. 모양도 맛도 제법 그럴싸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내심 오늘, 형님의 생파는 없었기를, 생일상은 식당밥이었기를, 나도 모르게 빌어버렸다. 속 좁은 사람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정말 솔직한 글쓰기라 읽으며 욕하지 않길, 비웃지 않길 바라지만 뭐 어쩌겠나… 나도 내가 너무나 한심한 걸 안다) 사진 속 형님은 환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명절에 그 아이를 계속 보게 될지, 어쩌다 한 번 보게 될지는 모르겠다.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친정부모님과 함께할 계획이고 그 아이도 친정이 있으니 말이다. 어른된 도리로 나보다는 수월한 시집살이이길, 아니다. 그냥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빌어줘야겠다. 다만 (사랑 주고 사랑받은) 형님이 이 집안으로 시집와 며느리란 이름으로 이 세월을 감당한 나에게 한 번쯤… 안쓰러운 감정을 느껴줬음 싶다. 같은 며느리로서의 동지애나 그것도 아니라면 같은 여자로서의 서글픔이라도,


이미 나와는 다른 레베루(level)라,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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