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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미 Jul 08. 2022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속설을 바꾸는 힘.

살아가다 보면 사실인 듯 믿고 있는 것들이 있다. 자연스레 그렇다고 치부해버리는 것 들. 

한국인들은 4를 죽음의 숫자라 부르고 7을 행운의 숫자라 믿으며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재수 없다고 믿는다. 빨간색으로 쓴 숫자 4는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생김새다. 


두려움뿐일까. 첫 손님이 여자면 재수 없다는 속설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승차거부를 당했는지. 남자는 태어나 세 번 운다는 말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감정을 억제당했는지.


이러한 속설들은 대상이 가진 특성과 고유성을 무시한 채 성별, 특정한 숫자, 색깔이라는 편협한 기준으로 편을 가르고 혐오하고 배제하고 두려워하게 만든다.






아이가 축구를 시작한 지 세 달이 지났다. 훈련을 위해 오고 가는 길은 아이와 나, 둘만의 공식적인 대화시간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아이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집에 있으면 집안일이 보이고 다른 가족과 함께 있으면 나의 귀와 입은 분산된다. 그래서 이 시간이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소중하다. 나는 아이와 대화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 듣고 공감하고 내 얘기를 하고, 또 듣고 공감하고 내 얘기를 하고. 그 시간엔 아이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은 물론 그동안 견고하게 쌓아온 나의 세계도 부드럽게 확장되는 경험을 한다. 아이도 이 시간이 너무 좋다고 한다. 나와 같은 이유에서 일까. 엄마와 대화하는 시간만으로도 아이의 삶이 조금은 더 단단해지고 있는 걸 느낀다. 


이야기의 시작은 언제나 아이다. 아이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하고 책에서 재밌게 본 주제로 시작하기도 한다. 선거철에는 분주히 돌아다니는 선거차를 보며 후보 이야기에서부터 선거, 정치, 민주주의, 독재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까지 이야기가 확장되었고 언제인가는 촉법소년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날엔 “뭐야, 우리 정말 행복하잖아?”라는 다소 허무하면서도 즐거운 결론을 내리며 같이 웃었다.


일주일 전이다. 운전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귀 한쪽이 계속 간지러웠다.

(사실 아직도 가끔 간지러운데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


나: 갑자기 귀 한쪽이 너무 간지러워! 누가 엄마 얘기를 하고 있나 봐.

아이: 진짜? 누가 엄마를 생각하면서 사랑해, 사랑해 혼자 고백하고 있나 봐. 누굴까?


와, 나는 누가 내 험담하는 줄 알았는데. 고백이라니. 

아이의 생각이 너무 다정하고 달콤해서 한참 동안 감탄사를 내뱉었다. 누굴까. 혼자 내 생각하면서 고백한 사람은.








대상의 모호함은 감정을 확장시킨다. 


두려움의 대상이 모호하면 두려움은 커진다. 저 사람일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해코지 한 사람은 대체 누구야? 의심에 의심이 구슬을 꿰듯 이어지고 나를 둘러싼 모두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두려움뿐일까. 미움도, 의심도, 질투도 그렇다. 

반대로 두려움이 아니라 애정의 대상이 모호할 때도 애정의 마음이 커진다. 누구지?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이런 눈으로 바라보면 두려움과 질투의 눈이 아니라 애정의 대상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된다.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사람은 저 사람인가? 모두가 나에게 애정을 보내는 사람 같다. 


그렇다면 결국 내 마음의 문제다. 실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있지 않은 이상 내 마음이 나를 지배한다.(구체적인 사건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말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건 앞에서 피해자에게 필요한 건 “네 마음이 그래서 그런 거야”라는 막연한 비난과 평가의 말이 아니라 “네가 그래서 그런 게 아냐”라는 신뢰와 이해의 말이다.)  그리고 마음은 먹기에 달려있다. 이것을 이것이라 믿기로 마음먹으면 이것이 아니어도 이미 마음먹는 순간 내 삶의 방향은 그쪽으로 흘러간다. 타인을 두려움과 의심의 대상으로 바라볼 것인가, 애정을 보내는 대상으로 바라볼 것인가. 


우리는 귀가 간지러운 작은 몸의 거슬림을 가지고도 속설을 만든다. 누가 내 험담을 하나 봐! 이 속설을 입에서 내뱉는 순간 삶의 방향은 혐오와 배제로 흘러간다. 몸의 거슬림은 마음의 거슬림을 만든다. 그렇다면 이미 속설에 지배된 어른의 삶의 방향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아이의 시선이면 된다. 귀가 간지러운 걸 보니 어디선가 누군가가 나에게 사랑고백을 하고 있나 봐! 사랑해, 혹은 힘내, 잘하고 있어 와 같은 말들을 속삭이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단순한 사고의 전환으로 혐오와 배제의 속설이 사랑과 설렘, 응원의 속설로 변한다. 삶의 방향도 그리로 향한다.


나는 애정의 마음을 먹기로 했다. 누군가가 내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험담이 아니라 사랑 고백이라 믿기로 했다. 숫자 4를 죽음의 숫자로 믿고 있다면 4를 7번 써서 공포에 행운을 덧입혀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첫 손님일까 고민하고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눈물을 흘리는 남자들에게 (우리 집엔 남자 셋이 산다.) 감정에 충실한 멋진 남자라고 손가락을 추켜올려줘야지.


나는 세상이 나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믿는 방법을 아이에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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