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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너 Sep 17. 2020

사원증을 걸고 먹는 스무디의 달콤함

그 달콤함을 동경하다.



20대 초반, 그 당시 일했던 던킨도너츠 안국역점에는 유독 현대건설 사원증을 목에 걸고 오는 직원들이 많았다. 성장이 더뎠던 내게 그들은 너무도 크고 울창한 나무 같았다. 한 조직 안으로 들어가 나에게 부여된 내 책상 앞에서 일을 하는 한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게 어떤 느낌일까. 그들을 동경하고 있었다.



일을 끝내고 팀원들과 회식을 한 후  먹는 스무디는 얼마나 달콤할까?




그들과 닮고 싶어 선택한 것이 공무원. 다른 사람과 취업경쟁을 할 자신이 없었으니 한 비겁한 선택이였다. 당시 고졸이였고 사람과의 관계를 유독 힘들어 했으니 면접비중이 높은 사기업은 꿈도 못꿨다.



24살, 충동적으로 노량진의 한 공무원 학원을 끊고 첫 학원 수업이 끝나자마자 친구와 캐리비안베이를 가기로 약속할만큼 나는 공무원 준비라는 것을 아무런 무게감 없이 시작했다. 당시에는 열정도 없었고 확실한 목표도 아니였다. 택한 직업이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이고 낮과 밤이 바껴야하는 교대 근무가 있는 직업이라는 것도 합격 후에 자랑하러 간 친척모임에서 알았던 그 무지 했던 나였다.



합격만 한다면, 내 인생은 완벽하게 뒤바뀔거라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방황도 많이 했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방법도 잘 몰랐기에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난했고 목말랐다. 학원강사들이 강의를 할 때 가끔 친구관계부터 정리하고 핸드폰을 끊으라고 조언을 할 때마다.. (웃프게도 나한테 친구는 한 명뿐이 없었다.) 정리 할 게 없는 내 인간관계에 처음으로 감사했다.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매일 밤 고시원에서 오늘 내가 하는 공부방법이 맞는 방법인지 곱씹어보는 불안함이 있었지만 열심히 했기에 보상이란걸 나도 받을 자격있다고 생각했고 노량진생활이 힘들었던 반면 꿈을 꿀 수 있어 행복했고 미래가 기대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것이 나의 정말 꿈이 되버렸다. 가짜 꿈이든 진짜 꿈이든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뭔가를 꿈을 꿀 수 있는 나에 도취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넌 OOO 딸이야. 걱정하지마. 운이 안 풀릴 때가 있는거야. 운은 풀리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우리 OO이는 대기만성형이야"
나도 가끔 포기하고 싶었던 나를 부모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인생이 다가오는 문을 계속 열어야 하는 거라 했던가..난 3년이라는 수험생활을 성공으로 마무리 지어 신분상승을 했고, 모든 것이 탄탄대로 일 줄 착각을 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집에서 나를 우환 덩어리로 보던 친척들에 빅엿을 날린 것이 가장 기뻤다.



교육원을 끝마치고 본격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내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다른사람과 나를 비교하기에 바빴고 다른사람과 달랐던 나를 직장에서는 4차원,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말로 나를 평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 수식어에 “말없는 애”가 추가되었다. 나는 문을 열지 못했다. 기대했던 달콤함이 아니였다. 내 스무디는 바닥에 떨어져 끈적끈적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닦고 버리고 새 스무디를 만들만한 나한테 더이상의 열정도 그리고 그 시간이 컴컴했다. 막연하기만 해보였다. 환상보다는 현실 이였다.



여기서는 니가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어. 괜찮은 척, 괜찮은 사람인 척 하는게 중요해




사람들의 평가에 계속 위축되기 바빴고, 그래도 자기주장을 비교적 그래도 하는 편이였던 내가 말을 절기 시작했고 어눌하게 바뀌는 듯 했다. 그리고 난 직장에서는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마음이 점점 망가지기 시작했는데 버텼다. 힘들게 갖게된 소속감을 놓고 싶지 않았던것 같다. 조금의 우울증이 대인기피가 되고 한 공간에 사람들이 여러명 있어도 속이 울렁거리고 불안했고 그 안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들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멍하게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퇴직하기 1년전 쯤 나는 팀에 완벽히 민폐가 되고있었다. 또라이 법칙이 있다는데 그 또라이가 나라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업무적으로는 힘든 것이 많지 않았다. 도움을 받고자 찾아온 민원인에게 내가 도움이 된다는 것도 뿌듯했고 일을 할 때는 아무생각이 안들고 집중을 해서 내가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에 행복했다. 하지만 대기시간에는 뭘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다른사람들은 이렇게 돈버는게 어딨냐고 했지만, 나는 그 빈 공간에 뭘 해야할지 몰라 답답했다.



조직 안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불안한 눈빛이 나를 닮은 것 같았다. 그 사람들 눈에 내가 보였다. 한 번 찍힌 낙인은 결코 조직생활이 끝날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다른 직원들에 떳떳하지 못하다. 군중 속에 고독이였다. 나는 그들에 다가가지도 못했고, 막상 다가와도 나에 대한 소문을 어디까지 알고있는 걸까 두려웠다.



나는 5년을 버티다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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