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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Mar 27. 2023

로스트 테크놀로지

문명의 지속을 위해 우리는 어떤 유산을 방주에 태울 것인가

한국시간으로 2022년 8월 4일, 미국의 우주항공업체 스페이스 X사의 팰컨 9 로켓에 실려 발사된 다누리호는 한국 최초로 달탐사라는 임무를 가진 대형 위성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력으로 로켓을 쏘아 올릴 기술도 없고, 위성이라고 해 봐야 통신, 기상 위성 정도를 제작하던 수준에서 이제는 누리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고 다누리 같은 달탐사 위성까지 제작하여 우주로 쏘아 올린 기술력을 갖춘 국가가 된 셈이다.


다누리호는 앞으로 약 4개월 반 여의 긴 여정을 통해 달 궤도에 무사히 안착하여 달탐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다누리의 안정적인 달궤도 진입을 위해 꽤나 복잡한 단계의 궤도 수정 방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BLT (ballistic lunar transfer)라 불리는 탄도형 달 전이궤도 방식과 NASA가 제안한 WSB (Weak stability boundary)라는 방식을 혼합한 방식이다. 팰컨 9 로켓에서 분리된 후, 수회에 걸쳐 일단 지구 주위를 선회하며 조금씩 궤적 반경을 넓히면서 지구 중력권에서 벗어나다가 대략 한-두 달 후에 지구-달의 라그랑주점 (L1)을 향해 궤도를 수정한 후, 다시 한-두 달 정도의 달 궤도 안착을 위해 달의 중력권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BLT+WSB 방식은 위에 언급했듯, 미세한 궤도 조정이 필요한 과정이고, 이로 인해 생각보다 긴 시간이 소요된다. 작년 말 발사되어 대략 한 달여 전부터 인류의 심우주에 대한 지식 지평선을 넓혀주기 시작한 제임스웹 우주망원경 (JWST) 역시 라그랑주점 주위를 도는 궤도에 안착하기 위해 한 달여간의 여정을 견뎌야 했는데, 다누리호는 이의 네 배 이상의 인내가 필요한 셈이다.


우주 탐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아마 이런 의문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 옛날, 무려 반세기도 더 전에 미국 (NASA)은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키며 (아폴로 11호) 인류 역사 상 최초로, 지구가 아닌 다른 천체에 인간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게 만들기도 했다. 아폴로 11호는 1969년 7월 16일에 발사되어 7월 20일에 달에 착륙했다. 발사한 지 대략 4일 하고도 6시간 반 정도 소요되었다. 즉, 반세기도 전에 인간은 그냥 위성도 아니고 우주인을 태운 착륙선을 일주일도 안 되는 소요 시간만에 무사히 착륙시킬 기술이 있었던 것이다. 다누리호가 BLT+WSB 같은 지루하면서도 어려운 방식의 접근 방식을 취해 달에 도달하려는 것과는 사뭇 대조가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사실 아폴로 11호가 반세기도 전에 달에 갈 때 한 달은커녕,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던 이유는 로켓 역사 상 가장 강력하고 큰 엔진인 F-1 엔진을 탑재한 새턴 로켓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폴로 4호부터 최초로 활용된 새턴 V로켓의 1 단부를 이루는 주 엔진인 F-1 엔진 (1단에 총 5개의 F-1 엔진이 필요)은 미국의 로켓다인사가 제작한 엔진으로써, 한 기 당 약 790톤에 달하는 추력을 낼 수 있다. 이렇게 강력한 추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수톤에 달하는 탐사선과 우주선 세 사람, 그리고 착륙선과 탈출 모듈까지 페이로드로 탑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달까지 가는 과정 역시 최단 루트로 향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지금은 F-1 엔진 같은 강력한 엔진을 안 쓰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다누리도 F-1 엔진 다섯 개 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라도 활용했다면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무거운 탐사 장비를 탑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불행히도 F-1 엔진은 아폴로 계획이 종료되면서 실전된 기술이 되어 버렸다. 즉, 이른바 로스트 테크놀로지 (Lost Technology)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F-1 엔진을 만든 회사와 설계도, 그리고 기술 메모와 연구 노트가 다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분초를 다퉜던 아폴로 계획의 바쁜 일정, 그리고 지금처럼 클라우드에 바로바로 올려서 백업하던 시스템도 아닌 오프라인에서의 아날로그 방식의 백업 시스템,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일일이 기록할 수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1980년에 미국의 로켓다인 사는 약 20여 년 전의 기술문서를 복원하여 F-1 엔진 관련 문서를 20권의 책으로 펴낸 바 있다. 그런데 그 책의 정보를 모두 참고하여 처음부터 로켓을 만드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위에 서술했다시피 기술 문서에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뀔 수 있는 기술 수정 사항이 낱낱이 기록된 것도 아니고, 엔지니어들의 trial-and-error가 구전된 것도 아니었으며, 당시에 공장에서 만든 부품이 아닌, 즉석에서 선반으로, 밀링머신으로 등으로 수작업으로 만든 부품의 설계도나 스펙이 완전히 전해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략 F-1 엔진 하나에는 5천-6천 개 정도의 부품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중 파악되지 않은 부품이 대략 5-10%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파악된 부품도 일부는 재현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내연 기관 낡은 올드카를 수집하여 분해 및 조립을 하는 고급 취미를 가진 사람을 알고 있는데, 이 분이 예전에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자신은 늘 가급적이면 자본이 허락하는 한 그 올드카를 같은 모델로 적어도 3대는 수집하려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수집만 하면 모르겠지만, 분해하여 개수한 후 실제로 도로에 몰고 나가는 것까지가 최종 목표라서, 올드카 하나만 분해할 경우, 없는 부품을 확보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 그래서 부품 확보 용으로 3대씩 구입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설계도는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50-60년대 만든 올드카 설계도는 실전된 것이 많아서 구하기 쉽지 않다고 했고, 대부분 이베이에서 고가의 경매를 통해 구한다고 했다. 그렇게 설계도와 예비 부품을 확보해도 실제로 차를 다 뜯어서 닦고 조이고 기름 쳐서 조립해도 그 차가 실제로 엔진에 시동이 걸리고 도로에서 안정적으로 굴러갈 확률은 채 30%가 안 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표준화된 대량 생산 자동차라면 모를까, 일 년에 몇 천 대 생산 안 된 올드카는 더더욱 굴러가는 것을 장담할 수 없는 이야기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동차 엔진도 이럴진대, 하물며 로켓 엔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나마 완벽하게 조립되어 잘 보존된 상태의 F-1 엔진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을 레퍼런스 삼아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라도 가능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리고 굉장히 의아하게도, 완벽하게 보존된 F-1 엔진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가 꾸린 민간 탐사팀이 아폴로 계획에 활용된 새턴 로켓 잔해를 수거하면서 제1 목표로 F-1 엔진을 회수하는 것을 목표로 두었겠는가. 실제로 베조스의 탐사팀은 2013년 대서양 심해 바닥에 거의 반세기 가까이 잠자고 있던 아폴로 11호의 새턴 로켓 1단 잔해를 찾는 데 성공했고, 드디어 F-1 엔진을 인양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에 더해, 전미의 회사 창고, 박물관 수장고, 군사 시설 등에 흩어져 있던 F-1 관련 부품들을 모으고, 실전된 기술을 다양한 방법으로 복구하여, F-1 엔진은 2010년대 들어 다시 현역 로켓 기술로 활용될 수 있는 방안이 생겼다. 


사실 F-1 엔진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명사를 통틀어 살펴보면 로스트 테크놀로지로 불릴만한 것들이 꽤 있다. 대표적인 것은 대부분 예술품 제작 기술인데, 그 외의 기술은 이미 현대 문명에 존재하는 훨씬 상위의 기술로 호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악기 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제작한 현악기는 대략 800개 정도 남아 있는데, 워낙 희소성이 있기 때문에 경매에 나오면 수십억을 호가한다. 스트라디바리우스 현악기가 고가인 까닭은 희소성보다는, 그 악기만이 낼 수 있는 음색과 음향 때문이다. 최근에는 현대의 악기 제작 기술이 발달하여, 적어도 수천만 원 정도 되는 고급 악기라면 스트라디바리우스와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구분하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스트라디바리우스만의 음색과 음향은 쉽게 재현하기 어렵다. 이 악기를 그대로 재현하기 어려운 이유는 설계도에 내재된 정보만으로는 악기 재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악기를 이루는 소재와 코팅재, 소재의 geometry 등에 대한 재현을 위해 현재로서는 그 악기를 기계적으로 혹은 화학적으로 분석하여 성분부터 추정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조선시대 의궤 기록용으로 활용되었던 초주지 같은 한지 제작 역시 지금으로서는 재현하기 어렵다. 종이로서는 가장 높은 기계적 강도와 수명을 가지고 있었을뿐더러, 한지 원료를 확보하는 나무들도 지정된 숲에서만 확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그 제작 방식과 원료가 되는 숲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기술이 현재 없다고 해도, 그것을 쓱 보기만 해도 재현할 수 있는 것들은 사실 그 분야에서는 이미 상위 호환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기술들은 호환되기도 전에 소실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F-1 로켓 같은 케이스는 비교적 최근의 기술이고, 또한 미국이 그야말로 국력을 갈아 넣어 만든 기술 중 하나일 텐데, 로스트 테크놀로지에 가까운 상태였다는 것은 의아한 부분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중요한 기술과 지식이라고 해도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되는 데에는 불과 반 세기 정도 밖에는 걸리지 않는다고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중요한 기술과 지식이 실전되는 이유는 F-1 로켓 엔진의 케이스를 다시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일단 그 프로젝트가 끝나면 프로젝트를 이어갈 인력이 흩어진다. 거대한 프로젝트일수록, 개인 차원에서 확보할 수 있는 정보는 대개 흩어져 있으며 단편적이다. 그리고 시스템적 관리를 벗어날 수도 있게 된다. 아폴로 계획 막판으로 갈수록 기술 메모나 시방서보다는, 엔지니어의 감과 즉석에서의 수정에 더 의존하게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나마 그 엔지니어가 부하나 후학을 키워갈 정도로 프로젝트가 지속되었다면 기술이 구전될 수라도 있었겠고, 아마도 백업할 기회도 더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프로젝트가 종료되면서 인력과 회사가 프로젝트에서 빠져나가면 그 암묵지도 같이 사라지게 된다. 또한 그 기술의 효용이 당장 필요 없어졌다 생각되면 기술의 유지보수 비용에 대한 경제적 논리에 희생양이 될 수 있다. 새턴 로켓의 부품이 NASA 한 곳에서만 관리된 것이 아니라, 공군기지, 박물관, 대학연구실, 심지어 사립 박물관 수장고 등에 흩어져 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한 곳에서 그러한 부품과 기술을 계속 관리하고 이어갈 동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실전된 기술에 대한 설계도와 자료들, 기술 메모들 역시 통합되어 관리되기 어렵다. 비록 로켓다인사가 20권의 책으로 펴내긴 했지만, 정작 그 책을 읽고 다시 F-1 로켓 혹은 그 업그레이드 버전을 만들려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미국이 90년대 들어 F-1 로켓 같은 거대한 로켓이 필요한 사업을 거의 추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거대한 로켓을 활용할 민간기업도 없었다. 2010년대 들어 베조스나 머스크 같은 IT 거부들이 우주탐사, 우주개발을 시작하면서 실전된 기술에 대한 관심이 생겼지만, 반 세기 가까운 시간 간극은 실전된 기술을 원상 복구하는 데 있어 많은 난제와 시간, 그리고 자본을 필요로 했다. 물론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면 얼마나 시간과 자본을 쓰든, 결국 복구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대부분의 현실에서는 실전된 기술을 복구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것이 상위호환 가능한 것처럼 보여도, 정작 현세대 기술에서 그럴만한 후보가 없다면 사실상 독보적인 기술이 된다. 그런데 그 기술이 없다면 프로젝트 전체가 망할 판국이 되는 경우라면, 결국 실전된 기술에 대한 비용은 눈덩이처럼 커지게 된다. 


고급 공학 기술이나 전문 지식은 이토록 세심한 관리와 연속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프로젝트 단위가 아닌, 산업 단위에서의 생태계 유지가 필수다. 시니어들이 주니어를 키우고, 교수들이 학생들을 지도해야 하며, 사수사 부사수를 가르쳐야 한다. 기술에 대한 끊임없는 업데이트가 될 수 있도록 연구와 개발이 지속되어야 하며, 그 산업에서 그 기술이 활용되는 케이스가 누적되어야 한다. 지식은 표준화된 문서 (논문이나 특허)로 차곡차곡 누적되어 DB 관리가 되어야 하며, 가급적 구전되는 노하우나 암묵지는 적어도 기관 내에서라면 통일성 있게 관리되어야 한다. 일반 사기업에서도 엔지니어들의 노하우 관리를 제대로 못 하면 몇 년 전에 성공했던 케이스에서 의외의 난항을 겪을 수도 있는데, 그래서 제조업력이 오래된 테크 기업들은 무엇보다도 노하우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많은 선진국에서 이른바 잘 나가는 분야 대비, 기존의 분야에 대한 인력과 생태계가 붕괴되면서 많은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지난 몇 년 동안 탈원전을 주창하여 원자력 발전에 대한 투자를 많이 감축했다. 여전히 제조입국으로서 원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지만, 몇 년간의 생태계 축소는 점점 원전 분야의 로스트 테크놀로지 케이스를 늘려가고 있다. 당장 원자력 공학과에서 배출되는 박사의 숫자가 줄고 있고, 그만큼 전공 분야는 점점 더 편협해지고 일부 전문 분야는 몇 년째 신규 박사를 배출하지 못하는 분야도 있다. 원전에 대한 찬반을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당장 한국이 원전을 가동하고 유지보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점점 로스트 테크놀로지 리스트가 늘어나고, 막상 이벤트가 닥쳤을 때 대응할 수 있는 인력과 노하우가 부족해진다면 이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있는 화공과에서는 한 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석유화학공업 생태계가 있었다. 석유 정제 기술은 물론, 석유라는 유체에 대한 이해를 위한 유변학, 공정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공정제어나 안전공학 등에 대한 전공이 폭넓게 있었으며, 그를 감당할 패컬티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러한 전공 담당 교수를 찾기 어려우며, 가르치는 내용 역시 한 세대 전의 것에서 별로 업데이트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의 주요 대학 화공과에서는 이제 석유화학공학을 제대로 전공한 박사를 찾기 어렵다. 문제는 한국의 주요 공업단지에는 여전히 석유화학공업 공장들이 거대한 규모로 가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석박사급 엔지니어가 없으면 안 돌아가는 시스템은 아니지만, 학문과 산업 생태계가 정체되다 못해, 퇴보하는 상황에서라면 결국 기술의 혁신은 물론, 과거의 노하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결국 산업경쟁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많은 전문가들은 말한다. 각 산업, 각 기술이 실전되거나 약화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산업, 그 기술이 경쟁력이 없거나,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서라고. 그런데 새로운 분야로 대체되거나 더 좋은 기술로 상위호환되지 않는 산업과 기술이라면 이러한 논리를 적용하기 어렵다. 국가 기간산업을 적어도 현상 유지라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기술과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관리될 수 있어야 하는데, 학계와 산업계에서 그냥 시장원리에만 그 변화를 맡겨둘 경우, 많은 분야에서 F-1 엔진 케이스가 답습되는 것 역시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모든 산업과 기술에서의 로스트 테크놀로지 방지를 위해 백화점 식으로 분야를 정부가 나서서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기술과 산업의 카테고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변하는 것이고, 산업에 있어서도 변혁의 주기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가 춘궁기에도 파종할 씨앗까지 먹지는 않듯, 경제적으로 어렵고 구조적으로 힘들 때에도, 적어도 맹아는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가 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적어도 이러한 맹아 지키기는 학계에서 하는 것이 맞고, 이를 위해 각 대학의 이공계 전공에서라도 맹아 지키는 것을 주요 정책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어느 순간부터 각 대학에서 이른바 밀어주는 전공은 돈 (간접비나 특허, 기술이전비, 창업 지분 등)이 되거나 논문이 많이 쏟아져 나와, 대학의 재정 개선과 랭킹 향상에 유리한 전공들로 급속히 바뀌고 있다. 화공과에서 전통 화공 전공자를, 기계과에서 전통 기계 전공자를, 재료공학과에서 재료역학 전공자나 합금 전공자를, 조선해양공학과에서 선박 설계 전공자를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러한 분야는 논문 나오기가 어렵고, 과제 수주하기도 어렵고, 창업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신규 전공 인력들이 다른 분야 경쟁자들과 임용-승진에서 실적으로 경쟁하기 어려우며, 임용 후에도 과제 수주가 어렵기 때문에 연구를 이어가기 어렵다. 자연스레 인기 없는 과거의 전공들, 과거의 기술들을 찾는 젊은 학자들, 젊은 엔지니어들은 학계를 찾지 않으며, 대학원에서의 학맥은 끊기게 된다. 몇 년 후, 몇 십 년 후, 그 분야의 그 기술이 필요하게 되는 시점에서는 아마도 F-1 엔진을 실제로 다뤄 본 엔지니어를 찾기 불가능했던 것처럼, 한국에는 그 노하우와 실전 경험을 갖춘 학자나 엔지니어를 찾기 어렵게 될 것이다. 당연히 그 빈자리는 다른 나라에서 확보해 오는 인력들에게 맡기게 될 것이며, 그 기술에 대해서라면 결국 그 인력들을 파견하는 나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창하게 말한다면 적어도 그 분야에서의 기술 주권을 양도하는 셈이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 학교에서든 정부에서든 모든 산업과 모든 기술을 다 세세하게 일일이 신경 쓰기는 어렵다. 각자 처한 사정이 다르고, 체급도 다르며 재정 상황도 다르다. 다만 원래의 목적과 취지에서 벗어난 평가와 보상 체계를 통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방식으로 더 많은 로스트 테크놀로지를 만드는 우는 가급적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실전된 기술을 몇 십 년 후에 필요로 하게 될 때 한국에 베조스 같은 억만장자가 사비를 들여 뭐라도 해볼 수 있는 이벤트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일 뿐일 것이다. 과실수를 베어내거나 농약을 뿌리지만 않으면, 그 과실수는 어쨌든 적은 양이나마 열매를 맺을 것이고, 적어도 종자는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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