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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Sep 25. 2024

[ABP: 일본의 반도체 권토중래의 꿈2]

래피더스의 출범, 그리고 그 미래

지난 글에서는 2나노 반도체로의 로드맵이 비교적 예측 가능한 수준에서 시장의 리더들에 의해 정해진 상황임을 설명했다. 현재로서는 5 나노 이하의 초미세 공정 기반으로 반도체칩을 제조할 수 있는 회사는 TSMC와 삼성전자밖에 없고, 앞으로도 이 구도는 변동이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에 대항하는 새로운 경쟁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을까?

일본 정부는 지난 2022년 7월 흥미로운 소식을 발표했다. 미국과 일본이 2 나노 공정 연구 개발 센터를 공동으로 설립한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참여하는 일본 측 파트너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립연구소인 물리화학연구소 (리켄)과 동경대이며 미국 측 파트너는 IBM이다. 양국은 2 나노 공정을 단순히 연구 차원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양산까지 연결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지난 2022년 12월, 미국의 IBM, 그리고 새롭게 출범한 일본의 반도체 연합체인 래피더스 (Rapidus)는 2 나노급 반도체를 공동 개발하고 2020년 후반기에 래피더스의 팹에서 이를 양산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래피더스는 일본 경제산업성 주도 (정부 지원금 700억 엔)로 일본의 키옥시아, 소니, 소프트뱅크, 덴소, 도요타 자동차, NEC, NTT, 미쓰비시 UFJ 은행이 공동으로 73억 엔을 출자하여 세운 회사다. 그런데 설립한 주체의 면면을 살펴보면 정작 반도체와 밀접한 (적어도 기술을 보유한 회사)는 키옥시아, 소니, NEC 정도밖에 없다.


일본과 미국이 연구 개발에서 양산에 이르기까지 2 나노급 반도체 생산에 협력하기로 한 배경에는 최근 들어 급격해지고 있는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의 다변화와 미-일 주도의 공급망 재편 시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현재 5 나노급 초미세 공정을 양산할 수 있는 회사가 대만의 TSMC와 한국의 삼성전자 밖에 없으니, 이들의 제조 기반에 문제가 생길 경우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는 재앙에 버금가는 영향이 닥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이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양국의 2 나노급 반도체 개발 및 양산을 위한 협력의 명분으로 작용한다. 3 나노가 아니라 2 나노를 콕 집어서 명시한 것은 TSMC와 삼성전자가 천명한 2026년 전후의 2 나노급 반도체 양산 로드맵을 의식하였기 때문으로 보이며, 목표로 한 양산 시점 역시 이를 고려하여 설정된 것으로 풀이된다. 연구 개발 단계에서 IBM과 리켄/동경대가 협력하는 부분은 2 나노 공정에서부터 필수적으로 요구될 트랜지스터 구조인 나노쉬트 (Nanosheet) 기반 트랜지스터 기술 개발이며, 래피더스는 이 기술을 이전받아 팹 단계에서 후공정 기술 개발과 더불어 반도체칩을 양산하는 일을 분담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래피더스와 IBM의 2 나노 반도체 양산 로드맵에는 현실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래피더스가 경쟁해야 할 상대는 TSMC와 삼성전자, 그리고 인텔이다. TSMC와 삼성전자는 이미 2010년대 초반부터 DUV 노광기 기반으로 28 나노, 18 나노, 14 나노, 10 나노 등의 초미세 패터닝 공정을 차례로 양산 수준에서 완성하여 반도체칩을 제조한 경험이 누적되고 있다. 그리고 EUV 노광기로 넘어오면서 발생했던 시행착오와 양산 최적화 경험도 같이 가지고 있다. DUV와 EUV은 같은 노광 공정이라도 사용하는 전자기파의 파장이 14배 이상 차이나며 (192 나노미터 vs. 13.8 나노미터), 공정에 필요한 포토레지스트 (감광재, photoresist) 같은 소재와 패터닝에 필요한 마스크도 전혀 다르다. 양사는 이 공정 소재와 장비 전환 과정에서 막대한 R&D 투자를 집행했으며, 양산 공정 개발에서는 그의 두 배가 넘는 투자를 집행하기도 했다. 추정으로는 TSMC가 DUV에서 EUV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집행한 R&D 비용은 167억 달러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며, 양산 과정에서는 32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투자되고 있다. (2015년 이후 누적 금액, 2023년 1월 현재). 삼성전자 역시 TSMC에 비해 파운드리 분야에는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DRAM 양산 공정 노하우를 바탕으로 14 나노 공정에서 최초로 FinFET 공정 양산을 시작했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산업에 본격 진출한 이후 10 나노 이하급 초미세 공정으로 넘어오면서 지금까지 누적 R&D 투자 비용은 2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역시 양산 과정에서도 TSMC와 맞먹는 30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투입되고 있으며 이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막대한 R&D 및 양산 비용은 EUV 노광기 같은 공정 장비의 도입 대수에서도 알 수 있다. TSMC는 2022년 12월 기준, EUV 노광기를 100기 정도 보유하고 있으며 2023년 말에는 133기로 보유 대수가 늘어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2022년 12월 기준, EUV 노광기를 TSMC 다음으로 많은 40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2023년 말에는 55기로 보유 대수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2018년 이후 양산에 쓰이기 시작한 EUV 노광기는 2022년 12월 기준, 전 세계적으로 166기인데 TSMC와 삼성전자가 무려 84% 넘게 과점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과점에 투입된 비용도 압도적이다. 1세대 EUV 노광기 한 기 당 최소 1억 달러의 비용을 잡는다 하더라도 TSMC는 이미 장비 도입 비용만 최소 100억 달러 이상, 삼성전자는 40억 달러 이상 지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TSMC와 삼성전자가 형성하고 있는 이 EUV 기반 초미세 파운드리 과점 구도는 당분간 깨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EUV의 세대가 교체되면서 장비 가격이 3배 이상 폭등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 고가의 장비를 감당할 수 있는 회사는 그간 파운드리에서 충분한 이익을 확보하여 현금 자산이 풍부한 소수의 회사 밖에 없으며, 그 구도에 다른 회사가 신규로 진입하는 것에는 너무나 큰 기술적, 재정적인 부담이 따른다. 이는 전통의 종합반도체 강자이자 로직반도체 제조 기술이 축적된 미국의 인텔도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EUV 노광기 도입을 서두르고 있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2018년에 4대를 도입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보유 대수를 늘려 2022년 12월 기준, 인텔이 보유하고 있는 EUV 노광기는 총 15대이며 2023년 연말에는 19-20대까지 보유 대수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인텔이 목표로 하는 EUV 노광기 보유 대수는 TSMC는 물론 삼성전자에도 여전히 크게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며 이 격차는 2020년대 후반에는 더 벌어지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인텔이 10 나노 이하 초미세 패터닝 공정에서 양사에 비해 여전히 기술적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양산 과정에서의 수율 역시 경쟁력이 높은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EUV 노광기의 높은 가격과 더불어, 특정 회사들에만 과점되는 방식으로 공급되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TSMC는 과거 ASML이 EUV 노광기를 개발하는 과정 초기부터 같이 참여하여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일부 기술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ASML이 TSMC를 EUV 노광기 공급 우선 대상자로 삼고 있고, 지금까지 제일 많은 물량을 공급하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또한 TSMC는 가장 많은 노광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가장 많고 다양한 EUV 노광 공정 기반 시스템반도체 양산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이는 ASML 입장에서 차세대 EUV 노광기를 개발하는 과정에 매우 중요한 기술적 정보의 원천이 된다. TSMC는 이 정보를 ASML과 배타적으로 공유하며 차세대 노광기에 대한 지분을 선행하여 확보하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TSMC 만큼은 아니지만 EUV 노광 공정을 이용한 다양한 반도체칩 제조 기술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으며, 이는 ASML과의 장비 도입 협상 과정에서 유리한 포인트로 작용한다. 특히 삼성전자는 TSMC와는 달리 3 나노 공정부터 트랜지스터의 구조를 기존의 FinFET에서 진화된 GAAFET (Gate-all-around FET)으로 바꿨는데, 이는 TSMC보다 먼저 새로운 구조의 트랜지스터 집적 공정에 EUV 노광 기반 초미세 패터닝을 적용한 결과에 대한 기술적 정보, 그리고 공정 수율 정보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선행 기술 개발 경험, 장비 도입 과정에서의 협력, 그리고 누적된 보유 대수라는 격차로 인해 TSMC와 삼성전자의 EUV 노광기 도입 경쟁은 현재의 양사가 형성하고 있는 과점 구도가 더 격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EUV 노광기의 공급이 2개 혹은 많아 봐야 3개 회사로 집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2 나노급 반도체 제조 시장에 진입하려는 래피더스 같은 신생 업체가 과연 EUV 노광기, 그것도 2세대 이후의 노광기를 확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미 ASML은 대부분의 물량을 TSMC, 삼성전자, 그리고 인텔에 납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간 생산량이 도합 최대 50기에 머물 것으로 보이는 1-2세대 EUV 노광기 중, 33기는 TSMC가, 12기는 삼성전자가, 그리고 나머지 4기는 인텔이 가져간다고 할 때, 래피더스가 받아갈 수 있는 물량은 1기가 채 될까 말까 한 수준이다. 설사 래피더스가 인텔 수준에 버금갈 정도로 1년에 3-4기 이상의 EUV 노광기를 도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 기에 3.5억 달러에 육박할 2세대 노광기는 그 장비 도입 비용만 해도 최대 14억 달러가 필요하다. 그 이후의 최적화에 걸리는 오랜 시간과 막대한 비용은 또 별개의 문제다. 그 외에도 2 나노 공정 팹을 건설하려면 적어도 1천 대가 넘는 반도체 제조 장비와 기술 지적재산권 활용에 대한 막대한 비용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이는 EUV 장비 도입 비용의 3-4배 이상의 투자를 필요로 한다. 즉, 2 나노급 반도체 생산 팹 라인 하나를 신설하기 위한 총비용만 해도 70-90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래피더스 연합체가 현재 확보한 770억 엔 (대략 7억 달러)로는 감당하기 벅찬 수준이다. 

기술적 기반은 어떨까? 현재 래피더스 연합체에서 팹을 제공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춘 회사는 키옥시아와 소니 밖에 없으며, 그나마도 소니의 팹은 구세대이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고, 키옥시아의 팹은 낸드 플래시 같은 메모리반도체 생산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시스템반도체 생산을 위한 파운드리로의 전용은 어렵다. 따라서 신규 팹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1천 대가 넘는 장비를 새로 도입하고 안정화하는 비용을 절감할 방안은 마땅치 않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래피더스가 유의미한 수준으로 2 나노 공정에 바로 뛰어들 수 있는 기반이 2026년 전후로 잡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가능성이 낮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만약 막대한 자본력 동원의 난점과 기술 격차가 극복된다면 어떨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이 원하는 2나노 반도체 칩 제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래피더스가 앞으로 몇 년 안에 2 나노 공정에 바로 뛰어들 수 있는 자본과 기술적 여건이 형성되었다 가정해 보자. (물론 가혹한 가정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제때 양산이 이루어질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즉, 충분히 경제성 있는 수율이 확보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 GAAFET, MBCFET 같은 2 나노 이하급 초미세 공정에 활용되는 차세대 FET (전계효과트랜지스터) 구조의 집적 공정에 대한 특허는 TSMC와 삼성전자, 그리고 IBM이 대부분 가지고 있다. 이를 피해 IBM의 특허 받은 구조를 비롯, 다른 구조의 트랜지스터를 채용하여 초고밀도로 집적 공정을 개발하는 것에는 큰 모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래피더스에 참여하고 있는 일본의 주요 반도체 기업 (소니, NEC, 키옥시아 (전신은 도시바))는 10 나노 이하 초미세 공정을 통해 고밀도 트랜지스터 집적 공정을 12인치 웨이퍼 스케일에서 양산해 본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특히 IBM이 가지고 있는 나노쉬트 기반 FET 특허 (일부 GAAFET으로 응용 가능), 그리고 후공정에 쓰일 수 있는 3차원 적층 기술 특허를 이전받아 고성능 반도체칩을 제조 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한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삼성이 3 나노급 파운드리 공정부터 채택하는 GAAFET (자료출처: 삼성전자, 아난드텍)


IBM은 주로 선행 기술을 개발하여 기술의 지적재산권을 확보하고 이를 반도체 기업에 이전하는 방식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해 온 기업이다. IBM이 가지고 있는 2나노급 이하에 적용될만한 트랜지스터 구조에 대한 기술은 분명 래피더스 입장에서는 TSMC와 삼성전자가 거의 독점하고 있는 선행 특허를 피해 갈 수 있는 우회로를 제공할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양산 과정에서 수익이 보장되는 수율을 얻기 위해서는 지난한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투입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지난 2022년 8월, 세계 최초로 3 나노 공정부터 트랜지스터 구조를 FinFET에서 GAAFET으로 전환하면서 기술적 우위를 선보인 바 있으나, 현실은 FinFET 공정에 비해 여전히 낮은 수율과 높아진 공정 비용이라는 난제가 남아 있다는 것, 그래서 여전히 시간과 비용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TSMC는 3 나노 공정까지는 트랜지스터 집적을 위해 기존의 FinFET으로 진행하고, 2 나노 공정부터 GAAFET과 비슷한 구조인 MBCFET으로 가는 공정을 계획하고 있다. 그렇지만 TSMC 역시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트랜지스터 아키텍처의 전환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게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2 나노 공정의 양산 시점을 뒤로 미루게 만들 것이고, 계획했던 것보다 더 높은 공정 비용을 유발하게 될 것, 그래서 생산되는 칩의 원가는 높아지는 결과로 연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2 나노 양산 공정에서 활용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차세대 트랜지스터인 VTFET (vertical transport FET)은 IBM과 삼성전자가 공동으로 개발한 트랜지스터이기 때문에 래피더스에 독점적으로 이전되기도 어렵다. 이미 초미세 패터닝 양산 공정 경험이 축적된 양사에서도 이러한 난제가 있었거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 초미세 공정에서의 고밀도 트랜지스터 집적 양산 경험이 전무한 일본의 반도체 회사들이 이를 더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 예상하기는 어렵다. IBM의 기술적 지원은 대부분 새로운 형태의 트랜지스터 최적화일 뿐, 이를 어떻게 12인치 웨이퍼 수준에서 양산할 수 있을 것인지는 결국 일본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될 것이라는 점이고, 그 규모는 선발 업체들보다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로드맵도 계속 뒤로 밀리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TSMC가 2 나노급 파운드리부터 채용하게 될 MBCFET (자료출처: CNXSOFT)


설사 IBM의 2 나노 반도체칩 제작에 필요한 차세대 FET 아키텍처 그리고 패키징 기술이 적극적으로 지원되고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제조 기술력이 뒷받침되어 마침내 2 나노 반도체칩 제조 기술 개발에 성공하고, 이것이 적절한 시차를 두고 양산 공정으로 이어졌다고 가정해도, 그 시점은 TSMC나 삼성전자의 양산 시점과 적어도 3-4년 이상 차이 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2027년에 래피더스의 2 나노칩 제조 기술이 마침내 개발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이 양산으로 이어지는 데에는 적어도 2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일러야 2029년 하반기나 되어서야 양산에 돌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 로드맵 상으로는 삼성전자 혹은 TSMC와 2 나노 반도체 양산 기준으로 적어도 3년 이상의 시차가 발생함을 의미한다. 

이는 2023년 1분기 기준 3 나노 양산 공정이 가장 최신 공정임을 고려할 때, 마치 14-18 나노 양산 공정에 막 돌입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에 비견된다. 현재 중국의 1위 파운드리 기업인 SMIC (중신궈지)는 양산 기준으로는 14 나노 공정이 최신 공정이며, 10 나노 이하 공정은 시험 공정 (risk production)에서 DUV 노광 공정 기반 멀티패터닝 (SAQP)을 통해 지난 2022년 연말에 달성한 7 나노 공정 제품을 선보인 수준이 최선의 상황이다. 현재 미국의 반도체 기술/무역 제재 하에 놓인 중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SMIC는 이보다 더 양산 공정 기술을 진보시키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EUV 노광기 수입이 허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이 야심 차게 추진해 왔던 반도체굴기 정책은 초미세 패터닝 공정이라는 병목 지점에 막혀 더 진행되고 있지 못하며, 이로 인해 중국의 반도체 제조 기술은 한국이나 대만에 비해 적어도 3년 이상 뒤처져 있다. 그리고 이 격차는 앞으로는 계속 벌어지게 될 것이다. 

일본의 래피더스가 2 나노 공정 양산에 성공하는 시점에서 바로 이러한 현재의 SMIC 위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중국의 SMIC는 자사의 14 나노 파운드리 공정을 통해 중국의 내부의 거대한 수요에 거의 독점적으로 대응하고 있고, 따라서 수익 규모와 수익률도 높아지는 추세다. 그렇지만 14 나노 공정으로 제조된 반도체칩은 5 나노 이하급 공정으로 제조된 칩에 비해 부가가치가 낮고 성능도 제한적이기 때문에, 글로벌 팹리스 업체들이 원하는 수준의 고성능 칩의 제조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즉, SMIC의 레거시 공정은 글로벌 팹리스 업체들의 주문을 받기에는 정치적 상황은 물론, 기술적으로도 역부족이다. 이는 일본의 래피더스가 2020년대 후반 2 나노 공정 양산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중국 SMIC처럼 상대적으로 성능이 제한된, 그리고 부가가치는 더 낮은 칩의 생산에만 제한적으로 시장에서 경쟁할 수밖에 없을 것임을 예상케 하는 부분이다. 선행 기술 개발에 현세대 기술에서 얻은 수익을 꾸준히 투자해야 사업구조가 유지되는 반도체 업계의 특성상, 이러한 일본의 2 나노 반도체칩 비즈니스 구조는 오래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기술 격차가 벌어질수록 그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더 많은 비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 비용을 일본이나 미국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미국 정부는 지난 2022년 여름에 통과된 이른바 반도체법 (CHIPS and Science Act)에 따라 자국에서 생산되는 반도체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지급하고 법인세를 25% 공제해 준다. 그렇지만 래피더스는 일본에서 반도체 칩 제조가 이루어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반도체법의 지원을 직접적으로 받기는 어렵다. 일본 경제산업성에서 700억 엔을, 그리고 아홉 개의 회사가 70억 엔을 공동으로 출자하여 총 770억 엔의 투자금 (약 7억 달러)으로 래피더스를 창립하였지만, 이 자본금은 선두 주자를 따라잡기 위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최소 300-400억 달러 이상의 R&D 비용, 그리고 그 두 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양산 공정 확보 비용의 조달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이미 일본은 자국의 반도체 산업의 몰락 과정에서 수많은 알토란 같은 기업들이 팔려나가는 와중에도 충분한 투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외국 기업에 헐값에 넘겨준 사례를 기억하고 있다. 한때 전 세계 낸드 플래시 메모리 1위 업체였던 도시바는 2017년 9월에 베인 캐피털이 주도하는 해외 컨소시엄에 2조 4천억 엔이라는 헐값에 매각된 적이 있다. 매각된 후 도시바의 메모리반도체 사업부는 키옥시아로 개명되었고 도시바를 비롯한 일본의 컨소시엄이 절반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지만, 현재 키옥시아는 낸드 플래시 메모리 시장에서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래피더스 컨소시엄에 참여한 NEC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때 독자 규격의 CPU를 생산할 정도의 반도체 칩 제조 기술력이 있던 NEC는 1990년대 말, 일본 경제산업성의 주도로 메모리반도체 사업을 히타치에 넘겨 합병시킴으로써 메모리반도체 사업을 접었다. 다른 참여 업체인 소니는 현재 일본에서 유일하게 반도체 팹을 운영하고 있는 업체이지만, 주요 생산품은 메모리반도체나 로직반도체가 아닌 CMOS 이미지 센서다. 소니의 이미지센서 시장점유율은 세계 1위 수준이지만, 이미지 센서 공정은 기술적으로도 초미세 공정과 거리가 있으며, 따라서 수익성 측면에서도 막대한 초미세 공정의 초기 창비 도입 비용을 감당하기에 어렵다. 그렇다면 결국 최소 300억 달러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되는 2 나노 반도체 칩 개발 비용의 대부분은 역시 일본 정부가 부담하게 되는 구조가 될 것이다. 문제는 이 거대한 규모의 자금 조달에 난점이 있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정부 주도의 반도체 프로젝트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반도체 제조업은 흑자와 적자 모두 언제든 대규모로 발생할 수 있는데 수백, 수천 억원 규모의 적자가 연속으로 발생하기 시작하면 시장점유율 하락은 물론 벌어지는 기술 격차를 따라잡을 가능성이 작아진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의반타의반 구조조정의 격류에 휩싸이는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물론 이는 한국 기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다만 래피더스는 이미 일본이 과거 반도체 산업의 구조조정의 실패 사례가 명확한 레퍼런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답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눈에 띄는 위험 요소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는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며 제조업 구조의 재편을 계획했는데, 국가 차원에서 차세대 전략 산업으로 선택된 것 중 하나가 반도체 산업이었다. 일본 정부는 관-민 협의체를 출범시켜 자국의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첨병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일본의 주요 반도체 회사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여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압도적인 성능과 수율을 바탕으로 시장 점유율 상위권을 석권한 역사가 있다. 그렇지만 1986년 제1차 미-일 반도체 협정과 삼성전자 같은 후발 주자들의 맹추격, 그리고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글로벌반도체 산업의 분업 구조가 대세가 되고, 2000년대 들어 자유무역주의가 횡행하면서 일본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지배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1980-1990년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던 자국의 반도체 산업이 몰락하는 것을 좌시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일본의 전자회사들이 글로벌 반도체회사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일본 정부의 혁혁한 공이 있었기 때문에,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게 놔둘리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0년대 일본 반도체 산업이 세계 시장에 진입하던 초기에는 정부의 계획과 지원이 자국에 득이 된 것은 사실이다. 중복 투자를 방지하고, 기업들 간의 사업 분야를 조정하며, 기술 정보의 공유를 장려하고, 각종 세제 혜택과 정책 자금을 지원한 것은 일본 반도체 산업의 급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980년대 일본 반도체 산업의 전성기가 온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이를 통해 일본 정부의 자신감도 더욱 탄탄해졌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한 세대 전의 성공 경험은 산업의 기조가 급격히 바뀌고 기술 혁신이 민간 기업 주도로 이루어지는 시점에서는 오히려 독이 된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들었던 일본 정부의 판단 착오를 불러왔을 것이고, 여기에 일본 경제산업성 관료 특유의 산업 정책 엘리트주의가 결합하면서 정부 주도의 반도체 산업 구조조정의 근거가 강화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생각하는 반도체 산업의 세계 지형은 더 이상 1980년대의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 정부는 자국의 반도체 회사들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무리한 인수합병 프로젝트를 반복하여 시행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메모리반도체 부분에서 삼성전자 같은 후발주자들에게 시장을 내어주기 시작하자 일본 정부는 NEC와 히타치의 메모리사업부를 통합하여 DRAM 전문 기업인 엘피다 (ELPIDA)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엘피다는 2003년 미쓰비시 전기의 DRAM 사업부까지 인수하면서 일본 메모리반도체 업계의 공룡으로 재탄생했다. 같은 해, 히타치와 미쓰비시 전기의 로직반도체 (시스템 LSI 반도체) 사업도 정부 주도로 합병되었고, 르네사스 테크놀로지가 출범했다. 이후 2010년 르네사스는 다시 NEC의 시스템반도체 사업부와 통합되면서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라는 공룡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문제는 2012년 엘피다가 글로벌 시장에서 누적된 적자를 버티지 못해 파산했다는 것 (이후 미국의 마이크론이 25억 달러라는 헐값에 인수), 2017년에는 도시바의 낸드 플래시 사업부가 해외 기업에 팔렸다는 것, 그리고 르네사스는 예전의 점유율을 내어주고 지금은 차량용 반도체 (MPU) 공급 업체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는 것이다. 후지쯔도 한때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수위권 기업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역시 플래시 메모리사업부의 부진을 버티지 못하고 구조조정을 거듭하다 결국 2014년 자사의 메모리반도체 생산 공장을 미국과 대만 기업에게 헐값에 매각하기도 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붕괴 과정을 다룬 책 (일본 전자-반도체 대붕괴의 교훈, 일본 반도체 패전)을 저술한 유노가미 다카시 소장 (우측)


이러한 구조조정 노력들이 대부분 실패로 귀결된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그 중 주목할 부분은 1990년대 들어 전 세계 반도체산업이 종합반도체 모델 (IDM)에서 글로벌 분업 체계로 바뀌는 와중에 그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 있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도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1980년대의 성공 공식을 쉽게 버리기는 어려웠으며, 설계부터 제조까지 모두 수직계열화하여 회사 내에서 감당하는 것은 기술 기반 제조업체로서는 일종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분업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경영 상층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회사 경영진이 그 당위성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으며, 뒤늦은 변화 시도는 대부분 통하지 않았다. 변화에 더욱 느리게 대응한 일본의 경제산업분야 관료 시스템는 더 큰 악수를 거듭했다. 무너져가는 일본 반도체 제조업을 살리기 위한 일본 정부의 구조조정은 인위적인 시간 되돌리기, 10%, 10% 점유율 합쳐서 20% 만들기 정도의 전략 밖에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즉, 구체적인 전략이나 산업 지형을 고려한 효과적인 재조정이 아닌 전형적인 탁상 행정에 의한 정책 드라이브일 뿐이었다. 따라서 일본 정부의 뒤늦은 구조조정 정책이 대부분 부정적인 결말로 끝난 것은 놀랍지는 않다. 기억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전례가 불과 10-15년 전이라는 것이다. 즉, 반 세대도 안 지난 시점에 일본 경제산업성이 다시 자국의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이끄는 장본인으로 자처하고 나섰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일본의 산업계가 아닌 일본 정부가, 그것도 그 목표를 반도체 제조업 부활을 넘어, 아예 단숨에 최선단 공정인 2 나노 반도체로 잡았다는 점, 그리고 그 이면에는 구체적인 전략이 부재하고 현재의 산업 생태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래피더스의 2 나노 반도체의 미래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반도체 산업에서의 글로벌 밸류체인 (GVC) (자료출처: Boston Consulting Group (2020))


그렇다면 미국과 일본이 애초에 목표로 삼은 첨단 반도체 생산에 대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혹은 위험 분산이라는 명분은 어떨까? 미국이 생각하는 글로벌 공급망 (global supply chain)의 안정은 단순히 글로벌 밸류체인 (GVC, global value chain)의 재편과는 그 목적이 다르다. 글로벌 밸류체인의 재편은 말 그대로 특정 산업 내 부가가치 생산의 연결 고리를 각 참여 주체가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조정하는 것이라면,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특정 산업 안에서 연결 구조 자체의 안정성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즉, 글로벌 공급망은 경제성보다는 안정성, 그리고 공급 네트워크 내부에 있는 특정 노드 (node (네트워크 안에서의 연결 지점))에서의 끊김을 방지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된다.

특히 최근 첨단 산업 분야에서 경쟁 중인 각국이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반도체 산업에서 말하는 공급망 안정이 갖는 의미는 국가 안보의 차원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2022년 하반기 기준, 10 나노 이하 급의 초미세 파운드리 공정은 대만과 한국이 85% 이상 과점하고 있다. 14 나노 이상 급의 파운드리를 의미하는 레거시 공정도 70% 이상, 메모리반도체 생산은 한국과 일본이 50-80% 이상 과점하고 있다. 이렇게 동북아시아 지역에 집중된 첨단 반도체 제조 점유율은 천재지변이나 전쟁 같은 예상치 못한 불가항력적인 변동이 생겼을 경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격변을 가져온다. 즉 미국은 첨단 반도체 생산이 한 바구니에 담겨 있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 바구니가 튼튼하고 변하지 않는다면 걱정할 것이 없겠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동북아 지역에 모종의 이벤트가 생겨 첨단 메모리반도체 생산이나 파운드리 공정이 멈춘다면 대부분의 반도체 공급은 적어도 수개월에서 최대 수년 이상 공급이 지체될 것이다. 나아가 IT 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주요 국가들, 기업들의 혁신 성장 엔진도 멈추게 된다. 경제 성장 뿐만 아니라 첨단 반도체는 AI, 우주항공, 자율주행차, 그리고 양자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앞으로의 첨단 제조업 기반 국가 경쟁력의 필수 요소라는 점, 나아가 국방력 차원에서는 첨단 무기 체계 개발과 유지보수에 필수재라는 점은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우려하는 국가 안보적 차원에서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불안정 요소다.


미국이 한국이나 대만이라는 이미 최선두권 반도체 제조국가를 제쳐두고 일본과 연합하여 2 나노 반도체 생산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 그리고 다변화라는 목적이 있다. 특히 2 나노를 특정한 이유는 한국과 대만에 집중된 첨단 파운드리 기반 시스템반도체 생산이라는 특정한 노드가 글로벌 공급망 전체에 끼치는 위험 요인을 조금이라도 분산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미국의 맹방이라고 볼 수 있는 국가는 이른바 Five eyes라고 불리는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AUKUS라고 불리는 영국, 호주, QUAD라고 묶이는 일본, 호주, 인도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국가 중에 반도체 제조업에서 현재 충분한 점유율을 가지고 있거나 과거에 그런 경험을 해 본 (혹은 기반이 어느 정도 잡힌) 국가는 일본 밖에 없다. 영국 역시 반도체 산업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제조업이 아닌 설계쪽이다 (대표적으로 ARM 같은 회사가 영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일본은 과거에 비해 반도체 산업에서의 영향력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1억이 넘는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한 B2C IT 산업의 잠재력이 있고, 반도체 외의 제조업 기반이 여전히 탄탄하며, 반도체 산업에서는 허리에 해당하는 부품/소재/장비 업종의 경쟁력이 강하다. 그리고 일본은 2010년대 중후반 들어 조금씩 자국의 반도체 산업을 해외 기업에게 개방하고 있고, 해외 업체들과의 협업을 더욱 정책적으로 강력하게 지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일본의 독특한 위치는 미국에게 있어 글로벌 반도체 산업 공급망 다변화에 있어 일본을 최적의 파트너로 삼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 혹은 다변화를 위한 미국과 일본의 파트너십은 그 근거가 약해지고 있다. 실제로 2022년 이후 동북아에 쏠렸던 첨단 반도체 제조는 이미 조금씩 다른 지역으로 분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22년 12월,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서는 TSMC의 창립자 모리스 창과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같이 참석한 가운데 TSMC의 3 나노 공정 기반 파운드리 공장 확장 착공식이 있었다. 기존에 14 나노급 이상 레거시 파운드리 공정 위주로 미국에 진출하려던 전략을 수정하여, TSMC는 본격적으로 자사의 가장 최신 파운드리 공정을 대만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최초로 신규 건설하게 된 셈이다. 삼성전자 역시 미국 텍사스 주 테일러 인근에 건설하고 있는 신규 파운드리에 3 나노 GAAFET 공정을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통해 양사 모두 2022년 여름 이후 발효된 미국의 반도체법 지원 혜택을 추가적으로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TSMC는 미국뿐만 아니라 독일 드레스덴을 필두로 유럽 지역으로의 파운드리 공정 확장을 계획하고 있으며, 삼성전자 역시 중국에서의 사업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 지역으로의 신규 반도체 팹 증설을 고려하고 있다. 즉, 동북아 지역에 주로 쏠려 있던 첨단 반도체 제조 글로벌 공급망은 앞으로 전 세계 각 지역으로 다변화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에서의 생산을 통해 첨단 반도체 생산에 대한 글로벌 공급망 불확실 요소를 줄이고자 하는 미국-일본의 계획의 명분과 실효성을 약하게 만든다. 


물론 일본에서 2 나노 반도체 제조 공정이 본격적으로 양산에 돌입하면 첨단 반도체의 글로벌 공급망 안정성은 조금이라도 더 강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2 나노 반도체 생산은 다른 지역에서의 생산에 비해 차별화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개선을 위한 강점을 찾기 어렵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이제 더 이상 10 나노급 이하 반도체칩을 설계할 수 있는 글로벌 수준의 팹리스 반도체 기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며, 일본에서의 생산된 첨단 반도체 역시 일본 내에서 소비되기에는 일본의 반도체 산업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생산된 첨단 반도체는 대만, 한국은 물론, 이제 미국, 독일, 동남아 등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제품으로 점점 대체 가능할 것이며, 일본에서의 생산 규모가 다른 지역의 규모를 압도하지 않는 한, 일본에서 생산된 제품은 글로벌 첨단 반도체 칩의 시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 생산될 2 나노급 반도체칩 역시 생산 규모는 TSMC와 삼성의 1/10 이하에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 그 이유는 전술하였듯, high NA EUV 장비 확보 규모가 제한될 것이라는 점과 그 외 칩 생산을 위한 초기 장비 도입 비용 (CAPEX)에 대한 예산 확보가 충분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에서 생산되는 2 나노급 반도체 칩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안정성 강화 혹은 다변화에 있어 눈에 띌 정도의 영향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예외적인 가능성은 있다. 즉, 일본의 2 나노 반도체의 꿈이 '실패'라는 예정된 결말로 무조건 간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정된 결말을 뒤집을 수 있는 반전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미국-대만-일본의 반도체 3각 협업 체제다. 잘 알려져 있듯, 한국-일본, 한국-대만의 국제정치적 관계는 썩 좋은 관계는 아니다. 산업적 협력 관계는 이어지고 있지만 정치외교적 파트너로서의 상호간 인식은 그에 미치지 못 한다. 그런데 일본-대만, 일본-미국의 관계는 산업적 협력 관계 이상으로 상호간 호혜적이며, 특히 대만-미국 관계는 점점 고조되고 있는 대 대만 중국의 위협으로 인해 앞으로 (군사적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더욱 강력한 파트너십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협업 구조만 놓고 본다면 일본의 반도체 산업 허리와 대만의 반도체 산업 팔다리, 그리고 미국의 반도체 산업 머리가 결합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실제로 일본과 대만의 협력은 점점 확대되는 모양새다. 3 나노 공정 기술을 보유한 TSMC는 2022년, 일본 구마모토현에 있는 소니의 반도체 공장을 인수하여 차량용 반도체를 포함한 다양한 반도체 칩을 생산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23년 1월, TSMC는 일본 정부와 협력하여 구마모토현 외에, 다른 지역의 기존 일본 반도체 제조 공장을 인수하여 더 고성능 칩을 생산한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여전히 3 나노급 파운드리를 신규로 건설한다는 소식은 들려오고 있지 않지만, 지금의 일본-대만 협력 구도를 고려할 때, TSMC를 앞세운 대만은 일본 정부로부터 더 많은 지원책을 이끌어내어 일본과 첨단 반도체 제조 분야에서 더욱 협력 규모를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 

기본적으로 강력한 일본-미국의 협력 구도, 최근 미국에 증설을 서두르는 TSMC를 앞세운 대만, 그리고 일본-대만의 협력 확대 기조는 일본-대만-미국의 협력 구도가 아예 시스템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Chip4가 아닌 Chip3 동맹으로도 그룹지어질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Chip4에서 Chip3로 축소되는 과정에서 제외되는 것은 한국이 된다. 만약 Chip3 같은 구조가 고착화되면 어떻게 될까? 2020년대 중반 이후, TSMC가 일본의 래피더스 등과 협력하여 합자 회사를 세운다면 래피더스는 예상보다 빨리 2 나노 반도체 생산에 돌입할 수도 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여전히 그렇게 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높아 보이지 않지만, 대만이 중국으로부터 받는 위협을 분산시키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친 대만 국가인 일본을 제2의 생산기지로 삼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 패키지를 제공하면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장비 업체들이 TSMC를 중심으로 새로운 클러스터를 이룬다면 일본의 첨단반도체 제조 무대 복귀는 이제는 꿈이 아니게 된다.


일본은 여전히 한 세대 전의 반도체 왕좌를 차지했던 옛 영화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언제든 자국의 반도체 산업 권토중래를 위해 자금을 지원하고 외국 기업과 협력하며 자국의 시장을 개방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재조정 움직임에 적극 동참하고 TSMC 등의 선두 주자와 적극 협력하며 자국의 쪼그라든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키려 획책할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노력은 현재로서는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2 나노 반도체 생산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낮다. 제한된 자금 동원력, 기술 장벽, 참여하는 기업들의 의지 부족, 과거의 실패 사례, 쪼그라든 자국 내 반도체 제조 기반과 시장, 낮은 경제 성장률, 기술 도입 및 양산 공정 개발을 위한 비용 확보의 난점 등이 겹치면서 2 나노 반도체를 2020년대 후반에 양산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그렇지만 일본 반도체 산업은 아직까지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소재, 부품, 장비 산업을 중심으로 해외 업체들과 협력하여 조금씩 글로벌 무대로 복귀하는 속도를 높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 역시 2020년대 중반 이후 더욱 격심해질 글로벌 경쟁 구도, 새로운 블록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물리적 한계에 접근하는 현세대의 기술 한계 등의 도전 요소와 마주하면서 다시 떠오를 수 있는 이웃 국가의 반도체 산업 복귀를 마음 편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 2 나노 혹은 그 이하급 반도체 생산은 결국 양산 수준에서의 경쟁력 확보이며, 그 이하급 기술에 대한 차별화된 기술적 자산 확보로 이어져야 한다. 급격히 개편되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대체 불가능한 노드로서의 역할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현세대의 글로벌 기술 표준을 이끌면서도 차세대 첨단 반도체 제조를 둘러싼 생태계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2 나노 이하급 반도체의 시장을 창출할 새로운 응용처를 발굴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글로벌 반도체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며, 일본이 언제까지나 과거에 박제된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로 남을 것이라 단정하기보다, 지금의 격차를 더 벌리고 더 강력한 기술적 솔루션을 선도할 수 있는 기초과학과 원천 기술 개발에 한국의 반도체 산업 미래 방향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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