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공학 교육의 본질
대학의 전공에는 전공의 독립성의 근거가 되는 각각의 R&R (Role & Responsibility)이 있다. 그 중 공대에 설치된 교육 프로그램의 R&R은 각 분야의 엔지니어가 될 재목들을 길러내는 것일 것이다. 물론 자연과학, 사회과학 같은 다른 전공에서도 사회의 일꾼이 될 인재를 양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대의 R&R은 다른 전공의 R&R과 차별화될 수 있어야 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대에서 말하는 R&R에 적합한 인재 양성은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근래 전공 간 벽이 낮아졌고 다학제 융합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공학 교육 R&R의 무게중심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학생들로 하여금 엔지니어링을 체감하게 하는 것이다.
엔지니어링을 체감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체역학을 예로 들어보자. 화학공학과나 기계공학과 학부 3학년 과정 등에서 가르치는 유체역학은 전공 필수 과목으로서, 가장 난도가 높은 과목 중 하나이다. 커버하는 내용도 많고 깊이도 깊기 때문에 대개 한 학기의 기간이 벅차고, 따라서 교과서의 진도를 다 소화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학부 과정에서는 베르누이 방정식 이후의 과정, 예를 들면 네이비어-스토크스 방정식(Navier-Stokes equation)의 유도와 이의 다양한 유체로의 적용, 나아가 난류의 기초와 수치해석 모델링까지도 진도가 나가는 것이 중요한데, 한 학기 16주의 짧은 기간 동안 이를 모두 커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령 교수가 가르칠 욕심이 있어도 학생들이 따라오기 벅차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는 학생들 탓은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공대생들도 중도에 포기하는 비율이 높은 것이 유체역학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체역학 같은 공대 필수 과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면, 나중에 학생들이 졸업하여 관련 분야에 진출한 후 그것을 응용하는 현장에서는 본연의 전공 전문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 하게 된다. 예를 들어 3D 프린팅을 생각해 보자. 프린팅하기 위해서는 고분자 용융체를 얇은 노즐을 통해 압출시킨 후, 순간적으로 냉각하여 고화시키는 공정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때 프린팅 결과물의 품질 개선을 위해서는 압력, 압출 속도, 냉각 온도 등의 정밀 제어가 필요한데, 이는 비뉴턴유체에 대한 이해와 수학적 지식을 요구한다. 유체역학을 엔지니어링 레벨에서 충분히 익히지 못 한 학생들은 이 3D 프린팅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게 되므로, 혁신을 만드는 과정에서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공학 교육의 R&R은 하나의 과목을 깊이 알게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해당 전공의 테크트리가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 공학을 학생들이 익히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화학공학을 다시 예로 든다면 학생들은 4학년 때 전공 지식과 툴, 각종 계산 패키지와 실험 경험 등을 토대로 특정 화학공학 시스템을 설계, 가상/실상황에서 작동, 결과를 분석하는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진짜 엔지니어링 공부는 무언가를 구축하고 수정하는 경험에서 나온다. 이는 다양한 지식의 이해뿐만 아니라 그것의 연결, 즉, 시스템적 사고 방식을 요구한다. 그것을 학생들 스스로 깨달을 수 있으면 이상적이겠지만, 사실 많은 학생들에게는 개별 과목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우므로 교수와 조교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많은 학교에서 개별 과목에 대한 내용은 물론, 이들의 시스템적 융합으로 학생들을 이끄는 교육 자원 개발은 교원들의 연구력 개선보다 뒷전으로 밀리곤 한다.
학생들이 창의적인 엔지니어가 되고, 창업도 하고, 새로운 산업도 이끌고, 나아가 사회의 리더가 되는 방식의 선순환이 성립하려면, 원석 같은 학생들이 잘 다듬어질 수 있는 실질적이고도 시대에 맞는 그리고 충분히 차별화된 컨텐츠로 커리큘럼이 완비되어야 한다. 한국의 공대가 인구절벽, 의대쏠림 같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20세기의 커리큘럼을 뜯어 고쳐 실질적인 내용의 전달 효율을 높이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들을 융합하여 시스템적인 접근을 할 수 있도록 만들며,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엔지니어링 프로그램을 현장 데이터 중심으로 전문적으로 업그레이드하고, 더 많은 자원을 커리큘럼의 고급화에 투자하여 공대 본연의 R&R을 지켜내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대학들의 공학 교육이 개혁을 스스로 이끌어내지 못 한다면 공학 교육의 R&R은 결국 외부의 의도나 기준대로 정해지는 신세를 면치 못 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더 많은 학생들이 공학이라는 전공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변화를 이끌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