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문학의 기적이 될 수 있는가
노벨문학상이 가져온 문학 열풍, 언제까지 지속을 기대해도 좋을까
한국인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멋진 우연처럼, 한글날 바로 다음날 찾아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쁨을 선사했다. 모든 뉴스 1면과 포털사이트 메인, 각종 온라인 서점 메인 페이지와 오프라인 서점 메인 가판대를 한강과 그녀의 책들이 채웠다. 그녀를 몰랐던 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알게 되었을 것이고,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을 시간이 없었던 사람들도 그녀의 책을 한 번쯤 사서 읽어 볼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벌써 각종 서점에서는 한강 특별전 등이 열리며 많은 독자들을 주문 버튼 앞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점점 낮아지는 책, 특히 종이 책에 대한 수요와 무서우리만큼 빠르게 낮아지는 문해력에 대한 우려는 꾸준히 우리 사회의 문제로 대두되어 왔다. 사실 지금 필자가 이 문장에서 사용한 '대두'라는 한자어 표현도 누군가에게는 낯설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이만큼의 주목을 받는 작가의 존재가 한국의 문학 시장에 희망으로 오롯이 자리해 준다면 좋을 터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므로, 오늘 필자는 살짝 다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노벨상을 받은 한국인 작가의 소설. 평단의 극찬과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소설.
한강 작가는 뛰어난 필력과 섬세한 시선으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뛰어난 재능과, 그보다 더 강렬한 노력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녀의 책은, 독서와 문학에 갓 입문하는 사람을 대상으로는 추천할 수 없는 책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저명한 한국 문학 작가들의 작품 역시 그렇다. 입문자에게는 도무지 추천할 수 없다.
한국 현대문학의 슬픈 특징 중 한 가지가 이것이다. 기본적으로 가진 한의 정서와 채 풀어내지 못한 울분, 그리고 그 감정을 수많은 단어로 써내려가는 필치. 그 단어들은 때로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단어이기도 하고, 때로는 늘상 사용하는 단어이지만 작가의 시선을 입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쉽게 읽히는 아름다운 문장 하나에도 뒤로 수많은 뜻이 잠들어 있다.
다시 말해, 늘 무언가를 읽어 버릇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국 현대 문학의 언어는 낯선 언어다.
현대인은 늘 바쁘고, 대부분의 시간을 피곤한 상태로 보낸다. 학생이건 직장인이건, 책이란 여유가 있을 때에 읽는 것인데, 그 여유 시간에 굳이 낯선 언어를 해독하고자 하는 정성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자신이 책을 너무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일부러 독서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늘 존재하지만, 책 페이지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넘긴다고 하여 그것이 책을 다 읽었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 현대 문학을 읽는 데는 읽기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고, 사전 지식이 필요하며, 그 어떤 괴로운 주제 의식을 마주하더라도 물러나지 않을 건강한 정신이 필요하다. 여유 시간을 맞이해 책이나 읽어 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입문자들과 청소년들이 이런 대비책 없이, 마음의 각오 없이 저명한 작가의 대표 작품을 펼치게 되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분들이 경험적으로 아실 것이다.
우리나라 문학 시장이 자꾸만 사람들의 외면을 받는 것은 대형 서점 때문도 아니고, OTT 시장 때문도 아니고, 웹 컨텐츠 시장 때문도 아니다. 바로 이렇게, 다양성 없이 그저 어렵게 쓰여진 한스러운 작품들만이 국내 평단에서, 주류 작가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명작이요 대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 현대 문학 속에 얼마나 아름다운 작품들이 많은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만이 등단할 수 있고, 순수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작품들보다 우월한 취급을 받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감히 말하건대, 나쁜 일이다.
초등학생이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에라도, 추후에 국어 교과서나 수능 지문에 나올까 봐 미리 그녀의 작품을 아이들에게 읽히려는 부모님, 선생님, 입시 학원이 생길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면 갑자기 머리가 트여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나이 들며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요즘 아이들의 경험은, 현대문학 작가들의 청소년기 경험과는 결이 다르고 방향도 다르다. 그네들의 작품을 요즘 아이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글자와 이야기에 익숙해진 채, 꾸준히 이야기를 해석해 나가며 쌓는 진짜 문해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문해력을 기르기 위해 아이들에게 권해지는 권장 도서들은, 전혀 해당 취지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청소년 문학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취지만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읽는 것에 재미를 붙이려면, 교훈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상상력 그 자체를 추구하는 작품도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청소년 권장 도서란 왕따의 문제점, 청소년 우울증의 심각성, 결손 가정의 고통, 차상위 계층 가족의 어려움 등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루는 경우가 지나칠 만큼 많다. 책을 펴면 우울한 이야기를 읽게 될 것이라는 게 아이들의 무의식에 새겨진다면, 어떤 청소년이 여가시간을 독서로 보내고 싶어 할 수 있겠는가.
어른들은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판타지 문학이나 로맨스 소설 등을 굉장히 낮추어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것들이 오히려 아이들을 책에게서 더 먼 방향으로 이끈다. 책에서 꼭 보이는 무언가를 얻어야지만 가치 있는 독서는 아니다. 그 책을 읽는 동안 행복했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한 가치가 되어야 한다. 좋아하는 이야기를 그렇게 단숨에 읽어내려 가는 힘이, 몇 시간 동안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힘이 결국에는 문해력으로 쌓여, 나중에 아이들이 읽어야만 하는 길고 복잡하게 꼬인, 재미없는 비문학 지문을 버텨내고 해석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힘이 있어야지만 비로소 형이상학적이고 기이하지만 알고 보면 정말이지 많은 뜻을 담고 있는 요즘의 현대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아이는 독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안데르스 올손 스웨덴 한림원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한강 작가의 작품 <소년이 온다>를 소개하면서 "묻히지 못하는 신원 미상의 시체를 보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모티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 바 있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아이들은 물론이요, 성인들 중에서도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물론 브런치의 매체 특성상, 이곳에서 글을 읽는 분들은 아시는 경우도 많겠지만).
그런데 <안티고네>를 모르는 것이 큰 문제인가? 잘못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건 그냥 문학에서 점점 멀어지는 사회를 보여주는 한 단면에 불과할 뿐, <안티고네>와 그 주제가 현대인의 삶에 필수적인 상식은 아니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 문학 장르를 집필하거나 평론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학 제반 지식이 부족한 평범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잊지 말아야 한다. 문학도 결국에는 '상품'이다. 예술을 아무도 향유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문학이 취해야 할 자세는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작품의 가치를 더 잘 알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독자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고고하게 홀로 서서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는' 대중을, 소비자를 깔아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건 소비자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컨텐츠의 수와 종류는 나날이 다양해지고 있다. OTT 영화와 드라마, 유튜브 예능, 각종 숏폼 컨텐츠가 새롭게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웹툰과 웹소설도 꾸준히 사랑받는 컨텐츠가 되었고, 밀리의 서재 등의 이북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모두가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홍보하고 전략을 짠다. 재미있는 건, 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뛰어난 작품, 자신들이 많은 투자를 한 작품 혹은 인기 있는 작품을 내세워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고자 한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도 저 플랫폼이 내 것보다 못하다고 말하지 않고, 저 작품이 수준 낮고 저급하다고 홍보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한국 문학과 평단의 입장은 그들이 인정한 '순수 문학'이 아닌 장르와 영상물은 순수문학에 비해 저급하다는 뜻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글을 놓고 급을 나누고,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순간부터 문학 시장의 침체는 예상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만화방에서 빌려 보는 환상문학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며 터부시하던 어른들과, 웹소설과 장르소설을 폄하하던 '순수문학'계의 오만이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점점 더 약화시키는 요인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문학에서 글의 급을 따지는 것 자체가 오만이자 편견일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 사회는 일단 어린 세대가 무엇이든 읽어주기를 바라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에게 이미 책이란, 바라보기만 해도 쉽게 화려하고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영상 매체보다 후순위에 있는 이야기 매체다. 비용적으로도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숏폼이 더 저렴하다. 종이책 한 권을 살 돈이면 한달 내내 OTT 플랫폼을 구독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딱딱한 청소년 권장 도서 따위를 들이밀어 봤자 소용이 있을 리 없고,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에 잠깐씩 짬을 내서 독서를 해 볼까 하는 직장인들에게 여러 번 고쳐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싶어 하는 현대 문학 작품을 들이밀어 봤자 소용이 있을 리 없다. 교보문고 오프라인 매장도 적자가 나는 이 상황에서, 문학의 급을 따질 시간이 있을까? 독자들이 어디서 책을 사는지를 따져 볼 시간이 정말 문학 시장에 남아 있는가?
몇 년 전의 파주출판단지를 필자는 선명히 기억한다. 많은 출판사들이 자리한 출판단지에서는 출판사별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며 출간된 지 몇 년 지난 도서나 살짝 스크래치가 난 파본 도서를 할인해서 판매하고, 작가와의 만남이나 어린이 대상의 강연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활발한 프로모션을 이어나갔다. 아이들의 손을 잡은 부모님이 많았고, 아이들은 출판단지를 나설 때 아무리 얇을지언정 책을 품에 안고 돌아갔다. 하지만 요즘의 출판단지는 유령 도시가 따로 없다. 도서정가제 이후로, 출판사들은 파본일지언정 할인 판매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책은 왜 시장 경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의문만이 씁쓸하게 남는다. 문학계는 이런 규제를 통해 '순수문학'의 지위를 지키고 출판사들을 보호하고자 했을지 모르겠으나 그 모든 것이 오히려 문학계를 뒷길로 밀어내고 출판사들을 위협한다. 어떤 상품이든지 시장의 선택을 받아야 살아남는 것이 당연한 현대 사회에서, 문학만이 예외일 수는 없다.
한자어를 사용하면 줄임말인 줄 아는 어린 세대와, 조금만 문장이 길어져도 해석이 어려워 골머리를 앓는 수험생들의 모습을 보라. 교훈을 남기고 사회를 비판하는 순수 문학보다, 아이들을 책 앞에, 책상 앞에 붙들어 놓을 수 있는 장르 문학이 지금은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한국 현대 문학은 아무리 뛰어난 작품일지라도 누군가를 위한 친절한 입문서는 될 수 없다는 걸,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다. 문학은 그저 이야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 안 그래도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운 문학 시장인데, 그 안에서 굳이 서로 급을 나눠가며 싸우려 들어서야 살아나려던 시장도 도로 쓰러질 일이다.
지금, 한강 작가의 멋진 성과로 많은 사람들이 서점을 찾는다. 그리고 그렇게 구매한 그녀의 작품을 끝까지 읽어낼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특히 자의가 아니라, 부모님이 혹은 학교, 학원이 지정하여 읽게 될 학생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다 읽는 바람에 떠밀리듯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면? 책을 읽던 사람들이, 역시 문학은 어렵구나, 나와 맞지 않는구나, 같은 생각으로 책을 내려놓게 되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다. 현대 소설도, 판타지 소설도, 추리 소설도 모두 문학이다. 현대문학이 아닌 다른 장르를 즐긴다고 해서 나의 취향이 저급하거나 지나치게 통속적인 것이 아니다. 더불어 지금 이해가 가지 않는 책이라고 하여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니, 부디 포기하지 말고 다른 책에서 또다른 기쁨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몇 권 읽다 보면, 그때 어려워서 내려놓았던 작품도 술술 읽어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확장되는 것이 독서의 기쁨이고, 보람인 법이다.
한 작가가 가져온 새로운 독서의 열풍이 어려움 앞에 막히지 않고, 다른 작품과 다른 장르로도 퍼져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길었던 이야기를 잠시 마무리할까 한다. 재능 있는 한국 작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당연히 기쁜 일이며 개인적으로도 축하하고픈 마음이다. 그러나 앞서 풀어온 이야기가 있는 만큼, 여기서는 마냥 축하하기보다는 그녀의 영향력이 부디 모든 문학을 위해 쓰이길 바란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과거 도서정가제를 지지했던 그녀이지만 이제는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된 만큼, 다른 문학 장르 없는 한국 순수 현대 문학은 한 종의 멸종으로 생태계가 무너지듯 더욱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한 번쯤은 고려해 주시기를 바란다. 지금도 한강 작가의 책은 많은 이들의 선망 속에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겠지만, 할인만이 홍보 수단이었던 작품들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문학이란 그야말로 모든 글을 포괄하는 단어임을 누군가는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다양한 이야기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오지 않는다면, 재미를 위해 쓰인 글이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되는 일이 멈추지 않는다면, 앞으로 올 세대의 문해력 역시 탄탄히 쌓일 시간 없이 흘러가 버리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