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옥한흠 목사님께서 돌아가신 지 11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11년 전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아침에 미역국을 먹다가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나 울었던지!
아마 평생 가장 즐거울 생일날에 그렇게 울어본 적은 없을 듯하다.
고 옥한흠 목사님 뒤에서 문서사역을 오래 했지만 정작 목사님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아니 모른다는 표현보다는 나의 존재 자체도 모르셨을 것이다.
그래서 더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기에 평생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으로 기억하고 있다.
부교역자들에게는 아마도 가장 무서운 담임목사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부교역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부모의 마음으로 도움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목사님의 사랑과 도움을 받은 목회자들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모든 사역을 자유롭게 맡기고 중간중간 보고만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성도들에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지금도 가장 뚜렷이 기억되는 것은 늘 성도들을 걱정하고, 가족들에게 잘하라고 당부하셨던 말씀이다.
매주 만나는 리더들과의 시간이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은 '교회일도 중요하지만 먼저 부모님, 남편, 아내, 아이들을 먼저 돌보라'라고 강조하셨던 말씀이다.
과거 사랑의교회는 1년에 두 번 '제자훈련 목회자 세미나'를 실시했다.
전국에 계신 목회자들에게 제자훈련의 방법과 훈련의 과정을 알려주는 세미나인데 그것의 하이라이트는 월요일~목요일까지 강의와 토론을 하고 마지막 금요일 오전에는 모든 소그룹에 직접 참관하여 평신도 리더들이 하는 소그룹 모임을 직접 경험해 보고, 오후에는 다시 세미나에서 배우고 소그룹에서 경험한 대로 실습을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평신도 리더들이 화요일에는 함께 금요일에 나눌 소그룹 모임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모두 세미나를 하고 있는 안성수양관으로 가야 한다.
수십 대의 버스가 그 시간을 마치고 돌아갈 때면 마지막 버스가 빠져나갈 때까지 끝까지 혼자 수양관 마당에 서서 '수고했다, 조심히 가라, 어서 가서 아이들 챙기라'라고 걱정 어린 모습으로 지켜보며 손을 흔들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막연히 30대의 여집사 정도로만 알고 계셨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어떤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자격이나 위치를 논하지 않으셨던 분이다.
안성수양관의 머릿돌에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경말씀이 새겨져 있다.
기도원이나 수양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제안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맞다. 기도하는 집인데 무슨 말씀이 더 필요하겠냐"라며 선뜻 그 말씀을 머릿돌에 넣자고 하신 분이다.
제안한 사람보다는 그 말씀이 성경말씀이기 때문에 누가 제안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 외에도 너무 많은 일화가 많지만 그런 일화를 떠나서 강단에서 하시던 메시지와 삶이 가까이서 지켜본 것으로는 같았기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들은 설교를 잘하는 분으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성도인 나로서는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분'으로 기억된다.
이전 같으면 매년 추모행사도 하겠지만 작년 10주년도 어영부영 지나가고, 올해도 아마 그리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목사님과 함께 제자훈련을 하고, 가르침에 따라 배운 대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목사님은 아시지 않을까 싶다.
점점 잊혀가는 목사님을 기억하며 30여 년간 이전의 사랑의교회에서 배운 모든 훈련과 경험들을 책으로 내려고 집필 중이다.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는데 목회자가 아니어도 제자훈련을 통해 평신도가 얼마나 사역들을 잘하고 있는지 그 열매들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목사님의 열매 중 하나로 기억되길 원한다.
올 11주년은 그렇게 목사님께 책으로 추모식을 대신하여 기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