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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비줌마 Oct 06. 2021

소통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이전에 보았던 영화들 중에 좋아했던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오래된 영화 중에 '라스트 모히칸'이라는 영화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는데 다시 보고 또다시 봐도 명작이다.



(다음 영화에서 가져옴)


1992년에 제작된 영화이지만 지금 제작을 했다고 해도 믿길 장엄한 자연 속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에 대륙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인 주인공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휩싸이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생과 사, 그리고 목숨을 건 사랑을 보면 영화는 영화다라는 생각 또한 가지게 된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고, 친아들이 아님에도 친아들보다 더한 천륜으로 서로를 지키고, 백인과 인디언이라는 인종도 초월한 인간승리의 모든 면을 다 그려내고 있는 영화다.


"살아만 있어라 어디든 찾아갈 테니"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사랑하게 된 여자 매들린 스토우에게 한 이 한마디에 서로를 신뢰하고, 믿고 의지하는 모습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고 협곡을 달리는 모습이나 거대한 폭포 속으로 떨어지며 이 한마디를 남기고 다음을 기약하는 모습, 절벽을 마치 뒷산을 걷는 듯 달리는 모습, 그리고 그 모두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끌고 가는 리더십 등 많은 것에 감동을 주고, 그런 순간마다 울려 퍼지는 라스트 모히칸의 ost는 벅찬 가슴에 한 방 더 내려치는 듯한 웅장함으로 또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아들이 사랑한 여자를 무조건 지켜주려는 아버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죽을지도 모르는 길로 달려갈 때 함께 달리며 힘을 보태주고 죽은 아들 대신 원수를 갚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눈물이 나는 것이 정상이다.

마지막 장면이기도 한데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부디 죽은 아들이 가는 길이 험난하지 않고 속히 가서 편히 쉬기를 빌어주는 아버지의 모습!!

바로 가족의 모습이다.


아침부터 기분이 울적했는데 매일 벙어리로 켜놓는 텔레비전에서 라스트 모히칸을 방영하고 있어서 또 봤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데 아무 소리도 없는 것이 답답해 가족들이 모두 출근하고 나면 보던, 안 보던 늘 텔레비전을 켜 두고 있다.

사람이 있는 듯한 느낌에 조금은 안심이 된다고 해야 하나 그런 기분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다는 친구가 남편으로부터 시작된 코로나 확진이 전 가족에게 전파되어 마지막으로 친구가 확진을 받았다.

이미 가족들은 치료센터로 하나, 둘 보내졌는데 격리되고 치료할 장소가 부족해 멀리 지방으로까지 보내지고 있다는데 아들이 마지막으로 지방으로 보내지고 뒤늦게 친구도 확진을 받았다.

그동안 가족들이 확진이 되어 조심을 하고 서로 격리를 했는데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꿋꿋이 버텨온 친구의 정신력이 무너졌는지 코로나의 증상은 그리 심하지 않은데 통화하면서 울고 그런 친구를 도와줄 수 없음에 나도 울고, 마음이 더 약해질 까 봐 서둘러 전화를 끊고 답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기껏 해 줄 수 있는 것은 입안이 깔깔해서 아무것도 못 먹겠다는 친구에게 이것저것 식사할 수 있도록 배달시켜 주는 것이 고작이다.

그랬더니 음식을 받고 내 마음을 알기에 자꾸 눈물이 난다며 고맙다는 말도 못 하겠다고 또 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기에 그만 울라고 다독이고 밥 잘 먹고, 약 잘 먹고 속히 털고 건강해지라고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

고등학교 시절 같은 교회에서 만난 친구인데 대학을 졸업하고도 서로 몰랐다가 40대에 연결이 되어 다시 교제를 이어간 친구인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친구다.


나 너 할 것 없이 우리에게는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다.

나이를 떠나서, 직위를 떠나서, 환경을 떠나서 함께하는 친구가 있고, 같은 또래라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친구들도 있고, 고향, 학교, 직장, 아이들을 통해 만들어진 친구들도 있지만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 일에 발 벗고 나서 주는 사람이라면 흔쾌히 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흔한 위로나 뻔한 말로 축하와 격려를 해 주는 사람, 인사차 나누는 안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는 친구라면 어떨까!

평소 소통도 없다가 아이들 결혼식이나 부모의 장례식이 계기가 되어 연락이 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영업 때문에 연락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연락을 했다면 반대로 상대방이 처한 같은 입장에서도 아는 체를 하고 연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잘 있었지"라는 말 한마디로 덮고, 자신의 상황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구라면 어떨까 싶다.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들에 욕심도 없어지는데 그중에 하나가 사람들에 대한 욕심이다.

이전에는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다 관계를 이어가고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체력도 안 되고, 당면하는 여러 일들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함께 웃고, 우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생각이 점점 많아진다.


며칠 전 우연히 멀리 중국에 계신 목사님 한 분에게 어려운 일이 생긴 걸 알게 되었다.

요즘엔 sns가 있어 전 세계 어디든 소통이 되는 세상이라 멀리 있어서 모른 척해도 되겠지라는 생각은 구시대적인 발상인 듯하다. 그만큼 가까이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빠르게 서로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사역을 했던 사이라 올라온 소식에 함께 기도의 자리에 있겠다는 마음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미력하지만 그 마음을 보태고 함께 좋은 소식을 기대해 보기 위해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을 흔히들 하지만 그 반대로 마음이 멀어지기에 몸도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친구 역시 맘만 먹으면 볼 수 있지만 그리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침마다 성경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고, 가장 먼저 단톡방을 두드렸던 친구인데 며칠째 아무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누구 하나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이 내 일이 아님에도 서운하고, 그곳에 함께 있는 친구들에게 배신감까지 드는 것은 나만의 오지랖일까 싶다.

날씨도 꾸물거리고, 친구랑 통화하며 울기도 해 우울한 기분이지만 그래도 친구라면 평소의 사소한 일상까지는 나누지 못해도 이렇게 소식이 끊어지면 '별일 없냐'는 안부 한 마디는 물어봐 주는 것이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친구가, 사람이 되려고 이번 일을 겪으며 다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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