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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맘 쑥쌤 Jan 06. 2023

엄마를 닮고 싶지 않아서

어느새 40, 거울 속 내 모습에 엄마가 보일 때

아침 샤워를 마치고 거울을 보니 올해 40이 된 내 얼굴에서 엄마 얼굴이 비친다. 신기하게도 할머니를 닮은 얼굴을 한 엄마가 또 내 얼굴에 비치는 걸 보면 '첫째 딸은 엄마를 닮는다나' 그리고 그 운명을 닮는다는 어른들 이야기가 스쳐 지나간다.


사람은 믿는 대로 생각한 대로 간다고 하던가 나는 홀어머님 밑에서 자란 남편을 만나 돈 한 푼 없어 내 모든 보험과 적금을 깨고 남편의 월급으로 하나 하나 예약금을 낸 후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어느 날은 가족이 돈을 빌려달라는 말에 밤새 울어서 눈이 퉁퉁 분 얼굴에 결국 무산된 대출에 안심을 하고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고, 연년생 출산을 하고도 반찬을 챙겨준다며 남편을 부르는 어머님이 서운하기도 했다.


어느새 30대가 되고 두 아이를 낳고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그저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나를 찾지 않았으면 했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삶 그저 내가 열심히만 살면 되는 삶을 원했다. 그것도 쉽지는 않았지만..


외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육남매를 키우셨던가.. 내가 아주 어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기억도 안 나는데 어른들은 또 할아버지가 나를 좋아하셨다나 뭐라나.. 그건 어른들 마음에 있는 사랑이지 내 마음에 있는 사랑은 아닌데.. 한국 K장녀에게는 참으로 꼬리표처럼 감정도 얹어주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


그 육남매 중 나는 큰삼촌이 제일 정이 갔다. 내가 좋아하는 해산물을 가끔 사다 주고 배도 태워주고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감정을 더 얹어주시지 않았다. 딱 믿음직스러워 보이고 수다스럽지도 않으면서도 나를 보면 자주 웃음도 지어주시고 그렇게 어른에게 장난을 치는 나를 허락해 줬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던 큰삼촌은 어느 날 집에서 혼자 돌아가셨다고 했다. 일용직을 다니면서 제대로 안 챙겨 먹고 건강을 챙기지 않은 탓이겠지 싶다.


아버지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엄마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갑자기 둘째 이모네 슈퍼집 근처에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를 딱 정하고 구멍가게를 열었다. 우리 집은 워낙 구멍가게라 우리가 집어먹는 간식값도 아까울판인지라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이모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마늘기계로 마늘도 갈고, 두부나 콩나물도 담아서 팔았는데 정육점까지 있던 그래도 동네에서는 규모 있는 슈퍼였다. 나는 아직도 가끔 그 슈퍼가 꿈에 나온다. 모두 빚에 팔려가고 다른 사람이 주인으로 바뀐 꿈..


이모부는 과로를 하신 건지 어느 날 응급차에 실려가셨고, 그게 끝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아빠가 없는 내가 걱정되어서 이모랑 이모부는 왔다고 했다. 그것도 마흔 다 되어서 들은 이야기지만 그것 또한 내가 원한 건 아니었다. 난 아빠가 없는 게 아니니깐.


그렇게 이모네 슈퍼는 정말로 누군가에게 넘겨지고 지하방으로 옮겨지면서 엄마가 정착한 이후에는 이모 빚을 같이 견뎌내느라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놈의 카드값..


"그리고 우리 엄마는 육남매의 맏딸.."


학창 시절 쉬는 시간 어설프게 잠들고 일어나면 눈 사이 미간에 주름이 지는 걸 알아챘는데 어느 순간 엄마의 미간에 주름을 발견했을 때, 닮아가는 거구나 싶었다. 피부관리를 해야지 왜 성형수술을 하거나 점 하나를 빼도 운명이 달라진다는데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의 운명은 싫다.


그리고 엄마나 아빠 없이 한부모 밑에서 자라야 해서 걱정이 된다면 그런 부모님께 꼭 말해주고 싶은 것, “나 때문에 다른 어른들이 희생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아빠가 필요한 게 아니라 엄마의 따뜻한 포옹과 믿음이 간절했어요. 그저 괜찮다. 우리라서 행복하다는 믿음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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