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의 한국정치>를 읽고.
욕심이란 걸 안다. 간혹 단 한 권 분량으로 나의 지적 갈증을 모두 해결해줄 책을 찾게 된다. 그 대상이 끝없이 변화하고 정리하기 어려울수록 더욱 그렇다. 지적 갈증과 지적 게으름은 한 발자국 차이다.
그렇다면 ‘한국정치’라는 분야는 어떠할까. 피상적으로만 접근하면 건조한 편년체 나열의 반복이다. 조금만 깊게 접근했다가는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현상을 논하는데 정치적이라고 나무라는 건 어불성설이라 생각한다. 조지 오웰이 말했듯이 그런 태도야말로 가장 정치적이고 편향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좌충우돌 속에서 희망 한줄기를 내려주는 책이 있다. 바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다. 마이클 샌델의 저작들이 그러하듯이 제목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책이다. 한국정치는 소용돌이 그 자체다. 다만 우리가 아는 ‘태풍’이 아니다. 정확한 영어 원제에는 ‘vortex’라는 단어가 들어가있다. 동심원적 상승기류가 강력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된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책이 무려 1968년에 쓰였다는 사실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에 근무 중이던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이 썼다는 사실이다. 그 옛날에 푸른 눈의 외국인(… 너무 진부한가?)이 고대 삼국시대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를 논술한 역량은 정말이지 탄복을 금치 못할 수준이다.
그레고리 헨더슨,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우리 정치는 왜 그렇게 매일 싸우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의 4가지 특성으로 요약된다.
“동질성. 단일성. 중앙집권. 소용돌이.”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울의 중앙 권력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향해 치솟는다. 이 힘이 소용돌이 상승기류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소용돌이는 사회의 응집성을 약화시키고 각자도생의 아수라를 만들어낸다. 인종, 지역, 종교, 직능 등을 두고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는 한국인들은 ‘서울’이라는 목표만을 쫓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정치는 싸움을 멈추지 못하고 희한한 갈등 전선(정체성정치, 팬덤 정치 등)에 집착한다. 미국인 외교관이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아울렀다는 점에서 충격(무려 1968년에!)이지만, 그 통찰이 2022년에까지 불변임에 또 충격이다.
승자독식 권력구조가 서울 부동산 공화국, 스카이캐슬, 비트코인 열풍 등 뒤틀린 경쟁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까지도!
요컨대 한국정치의 플레이어들은 서로를 너무 닮았기 때문에 합의할 수 없다. 결국 서울의 중앙권력을 잡기 위한 극단의 투쟁, 건곤일척의 총력전이 주기적으로 선거의 형태로 반복될 뿐이다. 그 무슨 정책을 쏟아부어도 수도권-지방 격차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 역시 이와 연결된다. 지방에 KTX를 깔고 대학교를 이전하고 대기업 공장을 유치해도 한국인의 DNA에는 서울을 선망하는 마인드가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다.
아울러 ‘자문기관’의 난립이란 현상은 비단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위 ‘청와대 정부’, 낙하산 인사, 비전문 평론가들의 난립, 캠프 정치, 내로남불 등 한국정치 고질병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그런데 고대사에 있었던 화백회의, 사출도 등의 개념들은 왕에게 자문할 권한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작의적 자리들이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정당체계의 내실화, 권력구조 개헌, 지방분권이 근본적 해법일까? 정치학도로서 두고 두고 생각하게 된다.
이와 같은 문화적, 역사적 설명은 우리가 지나온 길을 탁월하게 납득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운명론적인 비관주의에 우리를 가둬버리기도 한다. 오랜 시간동안 만들어온 경로가 이토록 끈질기게 우리를 구속하는데, 벗어날 방도는 정녕 없는 것일까?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가 유효한 도구가 될 수 있을까?
각설. 바쁘신 분들은 2부를 건너뛰셔도 무방하다. 더 바쁘신 분들은 책 앞 있는 해제와 책 뒤에 있는 서평만 읽어보셔도 무방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