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ny Mar 29. 2022

세상은 조용하게 바뀌지 않는다.

로자 파크스, 2016년 이화여대, 그리고 전장연


세상은 조용하게 바뀌지 않는다. 곱씹어 생각하면 자명한 이치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닥치며 돌아가는 세상은 그 자체로 시끄럽고 분주해야 마땅하다. 삼단논법을 불러올 필요도 없다. 역사 속 점들이 이어지는 끝에 있는 소결론이다.



로자 파크스 Rosa L. Parks. 중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1955년 12월 1일, 그녀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사실 양보할 것을 요구받은 일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당시의 ‘규범’과 ‘문법’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역경찰에 체포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의 1960년대를 뒤흔드는 기폭제가 됐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 연설문에 앨라배마주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닐 테다.


개인의 시민 불복종이 불러 일으킨 결과는 분명 ‘소음’이었다. 수많은 흑인들이 몽고메리 지역 버스 탑승을 강행했고, 버스회사 보이콧 시위를 이어갔다. 이내 백인 시민들도 함께 하며 힘을 보탰다. 단언컨대 사람들은 조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행렬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이란 없었다. 인간 마음 깊은 곳에 끓어오르는 분노와 울컥함이 전부였다. 그렇게 세상은 움직여왔다.


(2016년 당시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반대 시위)


시계 태엽을 아주 많이 돌려 바다 건너 한국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한국의 사회운동은 1987년 민주화를 기점으로 사뭇 양상을 달리 한다. 쉽게 요약하자면 ‘피해 당사자의 입증’과 ‘정치와의 무관성’이다. 어떤 사회적 사건이 반향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매번 반복되는 레토릭이다.


한국에서는 해당 사건으로 피해를 당한 당사자만이 도덕적 순결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오직 그들로만 이뤄진 발화만이 정당성이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당과 정치권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는 순간 그들의 ‘순수한 진의’는 의심받기 시작한다. 다음 총선 때 공천 받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서, 등등 ‘검증’을 빙자한 인신공격이 확인되지 않은 채 퍼져 나간다.


2016년 당시 이화여대 학생 시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시위를 일반적으로 기획하고 주도하는 ‘주최 측’은 명시되지 않았다.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이화여대 학생이어야 했다. 그리고 모두가 세월호 노랑리본, 정치적 구호 피켓 등 일체를 지참해선 안된다는 데에 합의했다. 일부 언론의 트집에서 자유롭게 하겠다는 의도였을 테다. (이런 면에서 이를 이용하는 행위자들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보면 다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이 개입하지 않고 변할  있는 일은 없다. 시민사회에 존재하지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들을 제도권 안으로 번역하여 법안으로 만드는 일은 정당의 존재 이유다. 정당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면 그저 ‘학생운동 그칠 뿐이다. 이화여대 사태 역시 학생들의 분연한 희생에 제도권 정치와 사법부가 반응하여 사법 처리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00%’ 피해자만 목소리를 내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건이 만들어낸 여파를 잠재우려는 의도로밖에 안 보인다. 위대한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가 짚었듯이, 현대 민주정에서 정치란 갈등을 사회화하여 내 편을 들어줄 구경꾼을 많이 설득하는 일이다. 어김없이 기득권을 가진 강자는 사회적 논란과 문제점의 범위를 축소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소수자와 비주류가 택할 수 있는 짱돌은 정치 전략이다. ‘정치적이지 말 것’을 강요하는 시선이야말로 정치적 의도의 결정체다.


(그리고 2022년 3월 28일. 대한민국)


시간이 흘러 2022년 3월. 그간 남성과 여성, 서울과 비서울, 의사와 간호인을 둘러싼 ‘갈라치기’는 있었다만 장애인을 둘러싼 그것은 없었다. 적어도 공식 석상에서 자신있게 말하고 이에 박수치는 무리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사태는 장애인이 그 집단에서 ‘대표성’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위에서 말한 전제조건들을 또다시 장애인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장애인들의 시위 방식이 ‘선량한 시민을 볼모’로 잡고 있다고 말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세상에 조용한 시위가 어디 있었나? 그리고 그들이 바꾸고 싶은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도달 가능한 것인가? 조롱과 비아냥, 편 가르기인 걸까?


<한국의 능력주의>, <88만원 세대> 저자인 박권일 은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비아냥거리고 그들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나름의 순기능이 있다면 사회 뒷전에 있던 문제들을 정면으로 건드린다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단서가 따라 붙는다. 아주 질 나쁜 방법으로.


혹자는 ‘갈라치기’와 ‘편 가르기’가 정치의 본질이라 항변한다. 그러며 어김없이 칼 슈미트의 ‘정치는 적과 친구의 구분’ 인용구를 운운한다. 그러나 기억하자. 칼 슈미트의 사상은 나치의 극단화를 추동한 뗄감이었다.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둘러싼 구경꾼들이 한명이라도 늘어나길 기원한다. 그리고 그 구경꾼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주길 기원한다. 그 목소리로 스스로를 ‘합리적’이라 착각한 혐오와 조롱, 비아냥을 몰아내길. 그러는 마음에 보태기 위해 이 글을 헌정한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