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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Mar 11. 2022

우리의 소원은 존중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읽고

본가에 다녀오면 좋은 점. 책장에 꽂아놓았던 책들을 다시 읽을 수 있다. 처음 읽을 때도 탄복했지만, 이번에도 여러 번 무릎을 탁 치게 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저작 <Identity>다. 한국어 단행본 제목이 보다 흥미롭다.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이 만들어가는 정치(학).


후쿠야마는 현대정치사에 ‘존엄’과 ‘정체성’이 등장하게 된 계기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전근대 농경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근대 산업사회 대도시에 몰려오며 정체성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 이때 이들을 집단적으로 묶어낼 정신적 접착제가 필요했다. 그렇게 발흥한 것이 ‘민족’ 정체성이다. 즉,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이들이 민족국가 설계의 시작점인 것이다. 이후 민족주의는 민족적 정체성과 정치적 정체성을 합치시켜가는 과정을 밟게 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의 자유로운 참여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와 끈끈한 집단적 유대감을 골자로 하는 민족주의가 공진화할 수 있었다는 명제는 강력한 설득력을 얻는다. 산업사회의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던 개인들이 존엄성을 쟁취해나가는 과정은 곧, 정치적 자유(참정권)의 확대와 민족국가의 확대로 이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후쿠야마는 정체성과 존엄에 대한 인정욕구가 현대 정치를 추동한 힘이었음을 강조한다. 존엄과 정체성정치 자체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는 경제적 양극화와 빈곤이 사람들에게 모욕감과 굴욕감을 주기에 문제라는 관점을 견지한다. 오늘날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극우 포퓰리즘 등의 원인 역시 세계화에 따른 이중노동시장화가 아니라 저학력, 저임금 노동자들의 인정투쟁과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문제는, 저임금 저학력 노동계층을 대변해야 할 좌파 정당들의 변질이다. 1960년대를 통과하며 기존의 좌파 리버럴 정당들은 경제 계급 전선을 버리고 세분화된 정체성들을 소환하는 경로를 택한다.  정당조직들은 인종,  정체성, 소수 부족, 페미니즘  각자의 내면 자아를 인정받고자 하는 이들의 무대가 되어버렸다. 후쿠야마는 이러한 전략을 ‘좌파의 쉬운 대용물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정책 패키지 대신에 투쟁과 인정 중심의 정체성 정치가 유권자 동원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심각한 후폭풍은 좌파의 정체성 정치가 반동으로극우 정체성 정치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 정체성 정치에의 강요는 이내 트럼피즘으로 대표되는 인종주의와 부족적 혐오주의를 불러 들이는 명분을 내주었다. 그로 인해 미국은 하나의 국민이라는 거대 담론과 공동체 의식은 온데간데 없이 내전에 가까운 부족전쟁에 빠져버렸다. 상대방을 정체성 전쟁에 참전시키면 합리적인 대화와 타협은 불가능해지게 마련이다.


이 책의 제목이 너무나 강렬했다. 그리고 그 명제를 한국 사회에도 대입할 수 있었다.  소위 ‘이대남 현상’이라 불리는 그것에 대해서다. 여러 분석들이 나오지만 결국 20대 남성의 생각은 본인들이 ‘존중받지 못했다’는 억울함과 좌절감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보수화’라고 마냥 단정지을 순 없다. 그러나 그들이 대척점으로 상정한 대상이 진보정당의 페미니즘 운동가, 리버럴 세력 민주당이라는 사실이 특이할 만하다.


단지 20대 남성이 지지연합에서 이탈했다고 해서 그들이 보수화되었다고 꾸짖거나, 어설픈 접근법으로 인해 혐오담론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만 만들어준 거대 정당 정치인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이유다.


덧. 2022년 20대 대선의 결과가 무척 흥미롭다. 도대체 이 수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20대 남녀 득표율이 정확히 58%씩 양분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세상이 굴러가느냐에 따라 후술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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