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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Mar 12. 2022

역사는 반복되고, 우리는 서로를 너무 닮았다.

<우리 안의 파시즘 2.0>을 읽고.

레니 리펜슈탈은 영화 감독이다. 별명은 ‘히틀러의 치어리더’였다. (지금 보면 꽤나 문제가 됐을 작명이긴 하다.) 그녀가 만든 영상물 대다수는 나치의 공식 선전물로서 오늘날까지 수없이 오마주된다. <의지의 승리>, <올림피아> 등에서 활용한 연출법과 카메라 무빙은 정치 선전, PR의 교과서와도 같다.


대표적인 예시가 <스타워즈>다. 1977년작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 마지막 훈장수여식 씬은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를 빼닮았다. 스타워즈 속 반란군은 다크 사이드의 폭정에 대항하는 세력이라지만, 주체를 돋보이게 하며 그들을 위대해 보이게 만드는 방법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각 장면 비교. 좌측이 <의지의 승리>, 우측이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


여기서 일종의 소결론이 나온다. 사실 어떤 집단이 포퓰리즘, 파시즘이냐 아니냐는 질문은 부차적이다. 그 구심점만 달라졌을 뿐이다. 인간은 누구든 집단주의적 연대와 이를 기반으로 한 위계질서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있다. 집단에 소속의식을 느끼려는 열망과 이에 배제될까 두려워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개하려는 책, <우리 안의 파시즘 2.0>은 유효한 생각틀이 되어준다.

이 책의 제목대로, 사회학자 임지현은 우리 마음 속에 내재된 파시즘을 짚어낸다. 한국 현대사를 비추어보더라도 파시즘(내지는 전체주의) 사고를 지닌 것은 비단 군부 독재정권만이 아니었다.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소위 ‘운동권’ 세력 내부에도 파시즘이 깃들었다. 이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등 사회주의 경제학을 주창한 학자들의 저작을 성서화하며 토론이라는 명목 하에 본인들의 가치관을 후배 학번에 이식하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민주화 조치가 이뤄지고 나서 한동안 이들의 사고방식은 자유화 조치와 노동운동의 홍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이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기간 동안, 그리고 촛불 탄핵정국 이후 등장한 문재인 정부 임기 동안 사회와 정치 분야 전반에 등장하고나서부터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틀에서의 선을 고정시킨 기반 위에 “우리가 하는 대업만이  개혁이라는 신념윤리가 들어선다. 이것은 결과로서 실적을 보여야하는 현실정치에 어색하게 접목되기 시작했다. 허나 현실정치, 특히 사회경제적 문제는 여러 이해관계가 교차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파시즘적 사고 반대와 우려 목소리 일체를 ‘기득권의 음모 단정짓는다. 자연스럽게 이들이 주도하는 정국에서는 모든 이슈가 ‘사즉생의 총력전’, ‘개싸움’ 모드로 변질된다. 그래서  가르기와 무조건적 머릿수 싸움으로 ‘돌파하는 것밖에 해결책이 없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은 반복된다. 그런데 자세히 따져보면 사실 반복되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그 수준과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 대상과 수단이 바뀔 뿐 우리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같은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나치에 열광하던 1930-40년대 유럽, 스타워즈의 수여식 장면을 보고 웅장함을 느끼는 우리들,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에 열광하는 우리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조국 수호’와 ‘윤석열 수호’를 외치던 각 진영의 우리들은 모두 같은 현생인류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이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직누른다.”는 마르크스의 통찰이 빛나는 이유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프랑스 혁명의 숭고한 용기가 결국 나폴레옹의 망나니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의 반동으로 귀결됐듯이, ‘포위된 요새’ 신드롬을 앞세워 다원화된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현실 사회주의 정치세력의 실험이 왜 아직도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는지. 이 모든 물음은 하나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시공간적으로 보나 통시적으로 보나 서로를 너무나 닮아 있다. 끊임없는 진자운동이자 작용-반작용의 연속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고만고만한 이유에 목숨 걸고 핏대 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덧. 박상현 작가님의 뉴스레터 <오터레터 Otter Letter>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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