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세라핌의 첫 번째 코첼라 무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으로 비꼬는 말투를 쓰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인용하지는 않겠다. 앞으로 내가 하려는 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르세라핌의 팬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이브 소속 가수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윤진이라는 이름의 멤버가 책을 읽고 글을 잘 쓴다는 사진을 보았다. 그러다 지난주 코첼라 유튜브에서 르세라핌의 무대를 보았다.
나는 작년 블랙핑크의 코첼라 무대를 보고 감동했다. 그룹과 멤버들의 국제적 위상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음악적인 부분은 전혀 몰랐다. 휘파람이라는 노래를 좋다고 생각하고, 제니의 템버린스 광고가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무대는 찾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코첼라 무대는 감동적이었다. 개개인의 역량과 동료들의 헌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무대만으로 감동시켰다.
르세라핌의 무대에는 감동하지 못했다.
그래도 된다. 그들은 나를 감동시킬 의무가 없다.
나는 도자캣의 무대에도 감동하지 않았고,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의 무대도 보다가 말았다. 노다웃의 귀환을 즐겼고, 레이(Raye)를 발견했지만, 실망한 무대가 더 많았다. 그런데 그래도 된다. 사람들은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고, 듣던 음악을 건너뛰고, 구독하던 유튜브 채널을 해지한다.
비판을 하는 사람들 중 코첼라에 올라 본 사람이 있을까?
토요일 오후 10시 50분 Sahara 스테이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까?
그 정도의 이해관계자와 얽혀본 적 있을까?
무대에 오르는 일과 비슷한 중압감을 경험해 봤을까?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쉽게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태생과 환경에 의해 주어진 운으로 버텨나가는 사람들이다. 기본 운빨이 크면 클수록 더 길고 크게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삶이라는 건 그렇게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들이 무시하는 일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모른다. 그들은 이끄는 사람(Leader)이 될 수 없다. 시키는 사람(Boss)만 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살아도 된다. 감동적인 무대를 만들지 못했다고 면박을 주는 보스로 사는 삶의 방식도 있다. 음향을 어떻게 세팅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파트 분배를 어떤 방식으로 나눌지 상의하고, 댄서들의 위치와 노래의 순서를 바꾸며 함께 감동적인 무대를 만드는 리더로 살 수도 있다.
영화 라따뚜이에 악역으로 나오는 음식 평론가 안톤 이고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여러모로, 평론가의 일은 쉽다. 위험은 거의 감수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평가에 자신의 직업과 스스로를 거는 그들보다 높은 지위를 누린다. 우린 혹평을 즐긴다. 쓰기에도, 읽기에도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평론가들이 직면해야 하는 씁쓸한 진실은,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비평이 하는 저울질보다는 아마 흔한 쓰레기 조각이 더 의미가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가끔은, 평론가가 정말로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새로운 걸 발견하고 보호해야 할 때다. 세상은 종종 새로운 재능과 창조에 냉담하다. 새로운 것에는 친구가 필요하다.
감동하지 못한 무대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자신을 감동시키지 못한 르세라핌보다 내가 더 낫다는 자기만족 말고는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것은 코첼라의 무대에 올라서 40분 동안 공연하는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회사도, 사업도, 일도 다르지 않다.
르세라핌의 Fearless라는 노래에 “내 흉짐도 나의 일부라면”이라는 가사가 있다. 어제 르세라핌은 지난 무대보다 장점을 부각하고 단점을 최소화하는 무대를 만들어냈다. 감동적인 무대였다. 그들의 과정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