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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하나 소셋 Jan 12. 2022

집이라는 곳의 가치

한집에 사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집에 대한 가치

어릴 적 내가 주로 살던 집은 한 스물다섯 평쯤 되는 연립주택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집에 부모님과 할아버지 그리고 언니와 오빠, 가끔 간헐적으로 삼촌들이 와 살았다.

방 하나는 할아버지가 쓰시고 안방은 부모님이 나머지 작은 방 하나를 우리 삼 남매가 같이 썼다. 가구를 제외하고 딱 삼 남매가 이불 깔고 누워 자면 끝인 공간이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좁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연년생인 오빠와 잠들기 전까지 놀다가 자곤 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친구들 집에 놀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혼자 방을 쓰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여자아이에 딱 어울리는 가구들로 채워진 그런 집들도 간간히 있었다. 슬슬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남인 아빠는 할아버지를 모셔야 했고, 동생들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우리 집은 항상 좁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방은 장남인 오빠 차지가 되었다. 나는 언니와 함께 방을 썼고, 언니가 시집가기 전까지 그렇게 그 방에서 언니와 둘이 지냈다.

언니가 시집간다고 했을 때, 솔직히 나 혼자 방을 써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내 마음대로 인테리어도 하고 벽지도 바르고 침대도 사고 내 마음껏 꾸며야지 하고 꿈에 부풀었다. 언니가 시집을 가자마자 실행에 옮겼다. 침대도 하나 사고, 그때 유행하던 나무 재질의 서랍장과 헹거도 샀다. 가구는 그럴듯했으나 방의 색감 자체가 문제였다. 오래된 벽지는 군데군데 곰팡이가 슬었고 장판은 누렇게 꼬질꼬질했다. 벽지를 다시 바르는 건 너무 일이 커진다. 페인트를 바르기로 했다. 혼자서 철물점에 가서 페인트와 붓을 사서 사방 벽을 다 발랐다.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지만,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꿈에 그리던 내 방으로 변해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 저 깊은 곳까지 행복감이 꽈악 차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천장이 문제였다. 나는 키가 작아 의자에 올라서도 천장이 손에 닿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빠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빠는 내가 방을 손대기 시작하면서부터 못마땅해하고 계셨다. 멀쩡한 방을 왜 페인트를 칠해야 하며, 조만간 나도 결혼을 할 터인데 저 가구들은 쓸데없이 왜 샀으며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아닌 일에 저렇게 부산을 떨고 목숨을 거는 딸을 절대 이해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반쯤은 화가 나신 상태였다. 천장을 칠해달라는 내 부탁을 마지못해 들어주셨다. 페인트를 칠하고 한 삼십 분이 지나서였을까? 아빠의 입에서 거의 육두문자에 가까운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팔도 목도 너무 아프시니 짜증이 치밀어 오르신 듯했다. 이 쓸데없는 일에 자신이 동원되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에 대해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화를 표현하셨다. 나는 옆에서 죄인이라도 되 듯 연신 미안하다고 한번만 부탁드린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아빠의 화를 다 받아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꿈에 그리던 사방이 하얀 벽면을 가진 방을 가지게 되었다.

장판도 은은한 나뭇결을 가진 것으로 깔고(이건 내가 해도 충분했다.)  침대와 헹거 서랍장을 깔맞춤으로 들이고 침구까지 은은한 파란색으로 바꾸었다. 25년 평생 처음으로 내방이 생긴 것이었다. 내 취향대로 꾸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온전한 내방이었다. 그때의 행복감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밤에 내 방에 누워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누웠던 바로 그 순간의 느낌이 아직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렇다. 나는 나의 공간이 너무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 공간을 내 취향대로 꾸며야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그래야만 무엇이든 할 용기와 의욕이 샘솟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취향대로 대충 꾸며진 곳에 들어가서 거기에 맞추어 사는 것은 그냥 그 공간을 견뎌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하루를 버텨내는 것과 안정적으로 사는 것 그것은 시간이 지난 후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준다고 나는 믿는다.


작은아이를 임신해서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이사를 하고 정말 정신없이 일과 양육을 병행 하면서 8년을 살았다. 버텨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이들이 깰세라 마루에 나와 한구석에 있는 장식장에 거울을 올려두고 도둑 화장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문득,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이 키우고 직장 생활하느라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집이라는 공간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다시 생각난 것이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했다. 다시 스물다섯의 내가 된 것처럼 이 사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신랑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리모델링을 하고 공간을 재 구획했다.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 집이라는 것에 대해 부여하는 가치가 다르면 이렇게까지 힘들 수 있구나 하는 경험을 정말 뼈저리게 했다. 스물다섯에 천장에 페인트칠을 하면서 육두문자를 날리시던 우리 아빠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건 일부 포기하고 절충할 것은 절충해서 서로 만족하는 합의점을 찾아 리모델링을 했고 나는 정말 행복했다. 너무 힘들었지만 리모델링이 끝나고 들어간 첫날 밤 최근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새벽에 깨지 않고 아침까지 잠을 푹 잤다. 역시 내 생각이 맞다. 나는 내 공간에 대한 만족감이 있어야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침까지 한 번도 안 깨고 잔 것이 아닌가


나는 최근 또 한 번의 전쟁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이제 슬슬 지친다.

큰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 하고 싶었던 "대학생 방"이 큰아이도 분명 갖고 싶을 것이다. 큰아이와 둘이 이렇게 저렇게 구상을 하고 사진을 검색하고 잠깐 동안 신이 났다.

그런데 집은 그저 잠을 잘 수 있고 따뜻하고 깨끗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우리 집 남자가 또 반대를 하고 나선다. 2년 후에 이사가 예정되어 있는데 굳이 이것저것 비용을 들여 가구를 사고 노동력을 들여 이리저리 가구를 옮기고 해야 하냐는 거다. 중복투자란다. 나는 이번에 사는 가구들은 이사 갈 때도 들고 갈 것이라 중복투자가 아니라 항변하지만, 이사하면 가구가 망가진다. 이년만 참다가 싹 다 새로 하면 되는데 왜 지금 이렇게 해야 하느냐 한다.

겨우 이년이란다. 하루를 살아도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나와 이 년쯤은 대충 살아도 된다는 그 차이는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이다. 어떻게 이년을 겨우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년이면 아이가 태어난다면 걸음마는 물론이고 엄마 아빠 정도의 말은 할 수 있는 나이까지 성장할 수 있는 그런 기간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공간에서 하루도 살기 싫은데 이년을 살아내는 동안에 내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가 정신건강에 또 신체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게 아닌가?


올해로 햇수로 22년을 살고 있는 남자지만 좁혀지지 않는 가치관의 차이는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십몇 년을 살고도 아직까지 자신의 가치관이 맞고 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생각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이제 슬슬 지친다. 아니 진즉에 지쳤다. 큰 아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내 방도 아니고 그냥 백기를 들어야겠다.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서연아, 너는 앞으로 네 마음대로 너의 공간에 가치를 부여할 날이 많잖니, 고작 이년은 그냥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보자.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발을 빼련다.

큰아이가 자신의 방에 대해 가진 가치가 스물다섯 살의 나와 같다면, 그때의 나처럼 아빠의 육두문자를 참아가며 자신의 방을 쟁취해 내리라 생각한다.

부디 힘내라 너의 공간의 가치를 쟁취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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