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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하나 소셋 Feb 16. 2024

대충, 정확히 그리고 빠르게..

공공기관에서 28년 살아남은 일 잘하는 노하우에 대하여

공공기관과 일반 기업이 많이 다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경험해 본 곳이 공공기관뿐이기 때문에 내가 입사해서 지난 28년간 근무하면서 느낀 "프로 일잘러"가 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먼저 1번 덕목은 "대충"이다. 

"대충"의 사전적 의미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만한 정도로."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란 말인가? 


공공기관은 기본적으로 정부에서 수행해야 하는 일이지만 정부기관이 모두 다 하기에는 너무 업무량이 방대하고 인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정 자격을 갖춘 기관을 지정하여 그 임무를 대신하도록 한 기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가 법령과 규정 내규에 거의 다 정해져 있다. 이 정해져 있는 일을 빠짐없이 적기에 수행하면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공공기관의 특성이다. 


대충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는 "대충"은 빈틈이 있게 대충 하라는 것이 아니라, 너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또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렇게 일하려고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너무 크기 때문에, 조직의 미션에 저해되거나 불법을 저지르거나 하지 않는 선에서 비교적 쓸만한 정도로 일하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아직 정확히와 빠르게 두 가지의 덕목이 남아있기 때문에 대충이라는 첫 번째 덕목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부장 시절 데리고 있던 2명의 차장이 있다. 한 명은 도가 넘치게 대충 일하는 사람이고 한 명은 단 한 가지도 대충이 없는 사람이었다. 편의상 '대충 차장', '안대충 차장'이라고 부르겠다. 


'대충 차장'은 말은 아주 시원시원하다. 무슨 일을 시키건 걱정하지 말란다.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하고 준비해 놨다고 큰소리 뻥뻥이다. 하지만 그가 맡긴 일이 결과로 도출될 때쯤이 되면 하나 둘 허점이 드러난다. 보고 문서에 계산식을 잘못 넣어 합계가 안 맞는다던가, 행사 일자를 실제와 다르게 기안문에 표시해 재 알림 공문을 보내야 한다던가 말이다. 하지만 어찌어찌 행사는 잘 치러지고 목적한 바는 꾸역꾸역 달성한다. 


'안대충 차장'은 일을 시작하기가 너무 힘들다. 분명히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시작을 늦게 해서 결국 날짜를 못 맞추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시작이 늦는 이유는 '안대충 차장' 본인이 그 일에 대해 충분한 이해와 지식이 있어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일단 일 시작 전에 거의 고등학교 기말고사 준비하듯 공부를 시작한다. 책을 찾아보고 논문을 뒤져보고 동영상 강의까지 듣는다. 

참 올바른 자세이긴 하다. 배우고 익혀서 일을 시작하려는 그 자세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정해진 기한이 있다. 대충 개념 정도만 이해하고 일을 진행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얻은 다음에 빠르게 일을 시작해서 정해진 기일을 맞춰서 일을 진행해야 우리 업무의 최종 수혜자인 국민이 불편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안대충 차장'은 자신의 업무 이해도를 높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통에 기한 내 일을 처리하지 못하기 일쑤고 그것은 결국 조직에 피해를 가져오거나, 국민의 불편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의 사례를 놓고 보면, 대충의 개념이 이해가 가리라 생각한다. 




다음은 "정확히" 다.

"대충"과 "정확히"는 어찌 보면 반대되는 개념이고 반대말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건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

대충 해도 되는 일의 범위와 정확해야 하는 일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까 '대충 차장'은 일의 중간중간 대충 처리해서 실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일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정확히 해낸다. 하지만 '안대충 차장'은 일의 중간중간을 완벽하게 처리하기는 할지 몰라도 가장 중요한 일의 목적 달성을 이뤄내지 못한다. 

일의 이유와 목적을 달성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정확해야 하는 것이다.

프로 일잘러는 대충 해도 되는 부분과 정확하게 해야 하는 부분을 확실하게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대충과 정확히는 한 세트다. 어떨 때는 대충, 또 어떨 때는 정확히 해야 하는 지를 잘 알고 유연하게 일하는 사람이 바로 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마지막 "빠르게"이다. 

이 빠르게도 앞선 두 가지 덕목만큼 중요하다. 

아쉽게도 앞서 이야기한 '대충 차장', '안대충 차장' 모두 이 "빠르게"의 덕목을 갖추지 못해서 일잘러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뭐든 다 빠르게만 일처리를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빠르게"는 다른 사람 혹은 다른 부서와 연계되어 있는 일을 할 때의 빠르게이다.

내가 일처리를 빠르게 해 줘야 그다음 사람 혹은 다른 부서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는데 내가 나만의 일을 하느라 그 일을 맨 나중으로 처리한다면, 연관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일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 입사 해서 처음 같이 근무하게 된 남자선배는 그 "빠르게"가 지독히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일의 순서상 그 선배가 일을 마치고 나에게 넘어와야 내가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 일의 마감시간은 오후 1시였고, 오후 1시가 되기 전에 그 전날 있었던 일의 마감을 마쳐야 했다. 

하지만 그 선배는 항상 열두 시가 다 되어서야 자신의 일을 마치고 나에게 넘겨주었고, 나는 그때부터 마감 시간을 넘기지 않으려 점심시간을 반납해 가며 아등바등 바쁘게 일을 해야 했다. 

제발 오전 열 시 전에 일을 넘겨달라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선배는 자신이 혼자 해서 완성할 수 있는 자신만의 일을 항상 가장 먼저 가장 심혈을 기울여하곤 했다. 

내가 병적으로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을 가장 먼저 가장 빠르게 해 주게 된 계기가 바로 그 선배이다.


이렇게 대충, 정확하게 그리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공공기관에서는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사기업에서는 어떨지 잘 모르겠다. 일의 특성과 목적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기업은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기 때문에 일의 순서나 방법이 우리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원칙이 일반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겉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은 그 어떤 허점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하는 사람인가 보다.

가끔 내가 한 일에 오타가 있거나, 계산이 틀렸거나, 순서가 바뀌었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웬일이냐?"며 깜짝 놀란다. 내가 그만큼 "대충"을 잘 숨기고 일해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실무를 떠나 관리자로서의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의 모토는


대충! 정확하게! 빠르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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