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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Jan 13. 2024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

엄마의 빈자리

아빠가 술을 마시는 것보다, 우리 집이 가난한 것보다, 나를 가장 주눅 들게 한 건 엄마가 없단 사실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혼 가정이 흔치 않았고, 맞벌이 가정도 드물었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 엄마는 당연히 집에 있어야 할 존재였다.


엄마의 부재를 숨기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이야길 하다가도 가족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슬쩍 대화에서 빠져나왔다. 그래도 성인이 되고나서부터는 대학, 취업으로 대화 주제가 넘어가면서 엄마 얘기를 할 일이 거의 없었다. 드디어 엄마라는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 그때부터 나는 당당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엄마 얘기가 다시 나오기 시작한 건 아이를 가지고 나서부터였다. 임신 막달 째에 의사가 물었다.

"아기가 주수보다 많이 작네요. 엄마(나)는 몇 킬로로 태어났어요?"

"... 잘 모르겠어요."

"자연분만이었어요?"

"... 모르겠어요."

"아니 지금까지 그런 것도 안 물어봤어요? 오늘 가서 엄마한테 물어봐요."


하지만 엄마는 고사하고, 아빠와 할머니까지 모두 돌아가신 후였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시긴 했지만 흔이란 연세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있으실 리가 없었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의 부재는 서른을 넘긴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건강하게 낳았지만 내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산후풍이 심해 온몸이 시렸고,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건 머릿속이 시린 거였다. 두개골 안에 찬 바람이 들어와 앉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한여름에 털모자를 꺼내 쓰고, 긴 팔, 긴 바지수면 양말까지 신었는데도 몸이 차다 못해 시리고 아렸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밤만 되면 눈물이 쏟아졌다. 여름도 이런데 겨울엔 얼마나 더 나빠질지 무서웠다.


잘 쉬어 산후풍이 나아진다는 도움 청할 데가 아무 데도 없었다.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시어머니는 허리가 좋지 않으셨고, 남편은 일이 한창 바쁠 때라 밤 12시를 넘겨 퇴근하기 일쑤였다. 육아 요리 청소 모든 걸 혼자 감당하다 보니 기력이 쇠해졌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는 것만으로도 온몸 식은 흠뻑 젖을 정도였다. 몸살에 걸려아기는 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계속 안아달라 보채면서 귀에 대고 으앵으앵 크게 다.


지금까지 다른 일들은 내가 열심히 하면, 남들보다 좀 더 부지런하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육아에 있어서만큼은 혼자 감당할 수 는 물리적 한계가 존재하는 듯했다. 체력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주변엔 다들 친정엄마가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오시거나 시어머니가 반찬을 챙겨주셨지만, 내 옆에는 도와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지금껏 잊고 지냈던 '엄마'가 떠올랐다. 나에게도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남편은 이를 키우면서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깨달았. 그래서 전보다 시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고 싶어 했다. 그 마음을 십분 이해했기에 힘들어도 남편의 의견 대로 따랐다. 그러나 점점 그 과정에서 아내인 내가 배려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댁을 둘러싼 남편과의 의견 차이가 커져갔고 다툼이 늘어났다. 


남편의 우선순위에서 내가 늘 시댁보다 뒤인 것 같았다. 아무리 설명해 봐도 남편은 내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했다. 억울하고, 외로웠다. 시댁에 가면 남의 가족 사이에 나 혼자 어색하게 껴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데도 소속되지 못한 것 같고, 넓은 세상에 내 편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아이를 키우면서 우울증이 생겼는데 남편마저 멀어지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독감이 커졌다. 내가 봉사해야 할 사람들만 넘쳐나고, 나를 도와주고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또다시 엄마 생각이 났다. 내게 친정이 있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 같았다. 남편이 장인, 장모님 눈치를 보며 나를 금보다 더 배려해 줬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온전히 내 편이 돼주는 사람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진 않을 것 같았다. 


내겐 마음의 고향이 없었다. 눈물바람으로 집을 뛰쳐나가도 마음 편히 자고 올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이혼을 고민할 때도, 되돌아갈 가족도 없고 경제적인 문제를 뒷받침해 줄 사람도 없었다. 뿌리가 잘려나간 나무처럼 내 삶은 언제나 기우뚱했다. 제아무리 나이테를 늘려 봤자 뿌리가 약한 나무는 거친 바람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엄마 없는 내 인생은 쉼 없이 불행한 것 같았다.




처음 소개팅을 했던 날, 남편에게 말했다. "엄마랑 아빠는 제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헤어지셨고 엄마랑은 연락을 안 하고 지내요. 엄마 얼굴도, 연락처도 몰라요." 그게 엄마라는 단어를 언급한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 후로 연애할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라는 단어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 정도로 엄마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아이 둘을 낳고 남편 앞에서 엉엉 울며 소리쳤다.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 나도 내 편이 있었으면 좋겠어..!!!" 


엄마를 찾으며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남편이 큰 충격을 받았다. 렇게 간절하게 엄마를 찾은 건 생애 처음이었다. 남들 다 가진 엄마란 존재가, 제발 나에게도 있길 바랐다.


이 모든 게 이 사건을 위한 빌드업이었을까.

그러고 나서 2개월 뒤,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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