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 진로 고민은 방황이 아니라 문제(Problem)이다.
"형, 나도 대학교 들어가면 그냥 형처럼 회계사 준비할까? 그게 나으려나 요새 취업도 잘 안된다는데....."
제 사촌 동생이 현역으로 입시를 치 작년, 수능이 끝난 후 저에게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똘똘해서 공부는 곧잘 하는데, 수능의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모의고사보다 못 나온 성적을 받고 못내 아쉬워했었죠. 지금 저희 모두는 대학이 전부가 아니고, 그 이외에 중요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지만 당연히 그때는 그런 게 귀에 안 들어옵니다. 당장 주변에서 어른들이 해주는 말도 단순 위로 차원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기 힘들죠. 저뿐만 아니라 그때는 누구라도 그랬고, 다시 돌아가도 똑같을 겁니다. 초, 중, 고등학교까지 12년 동안 공부로 살아온 사람에게 수능 망했다고 니 인생 망하지 않는다 라고 말해봤자 진심으로 '아 그렇구나' 생각할 사람 몇이나 있을까요.
그동안 쌓아 올린 성적이 아까워서 재수를 결심하고 잘하고 있지만, 저는 사촌 동생이 했던 저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때도 너가 하고 싶은 걸 우선적으로 찾아서 해보고, 공부로 취업하는 건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고려하는 최후의 보루처럼 생각하라고 했고, 지금도 똑같이 대답할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가 끝나고 대학교에 와서, 회계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나서는 저는 더 이상 진로 고민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어디서 뭘 하든 회계업계에 있을 테니까요. 남들과 하는 직무가 좀 다를지는 몰라도 보는 사람들이 거기서 거기일 것이고, 연차에 따라 올라가는 직급도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승진할 수는 없으니 누구는 좀 느리고, 누구는 좀 빠르고 그 차이겠죠. 입사까지만 해도 저는 제가 그 법인에 평생 있을 줄 알았습니다.
제가 진로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았던 적이 살면서 두 번 있는데, 처음은 IT감사로 회계법인에 입사하고 나서입니다. IT감사랍시고 배치가 되었고, 일을 배우다 보니 할 만은 한데 자꾸 머릿속에서 '그래서 이걸로 계속 갈 꺼야? 말 꺼야? 빠꾸할거면 언제할거야?'라는 생각이 입사 6개월차부터 점점 자라났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직전에는 3년차 수습회계사 이야기에서도 적혀있듯 큰 스트레스를 받았죠.
두 번째는 로컬로 나온 지금입니다. 거의 99%의 사람들이 공감하리라 생각하는데, 빅펌에 있으면 저 같은 '저연차 회계사'에 한해서는 진로에 대한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진데, 우선 대기업 다니시는 분들은 대기업의 이름이 주는 안정감이라는게 있다고 표현하잖아요? 회계법인도 마찬가지입니다. Big4의 이름이 주는 안정감이 있습니다. 회사와 자기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고, 회사가 자기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으며, 자기가 이 회사의 창립 및 발전에 전혀 기여한 바가 없는 걸 알면서도 그렇습니다. 소속감이란 게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매니저쯤 달 때가 되면 자기가 파트너가 되겠다 안 되겠다 감이 온다고 하시는 선배님들이 많은데, 그 구간부터 점점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신다고 합니다. 파트너를 달지도 않을 거면서 Big4에 오래 남아있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손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로컬은 정글이니 야생이라느니 하는 얘기를 듣고 나왔는데, 정말 맞는 말 같더군요. 우선, 진짜 돈 되는 건 다합니다. 다 해야 합니다. 회계법인 전체 공통으로, 지금은 일거리를 가려서 받을 처지가 아닙니다. 옛날에도 아니었구요, 앞으로는 더 아니게 될 겁니다. 그리고 영업하는 게 정말 힘들어 보였습니다. 영업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조금 더 살펴볼 기회와 함께 다른 선배님들이나 동료 회계사로부터 듣는 얘기가 많아지면 따로 한번 얘기 나눠보는 에피소드를 만들까 합니다. 분량으로 인해 다음 기회로 미루었지만 당장 영업해오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정말 쉽지 않아 보이더군요. 제가 영업을 하게 되면 이제 그런 자리잡은 사람들 틈에 비집고 들어가서 제 자리를 구축해야 한다고 하니 한숨이 나옵니다.
로컬에서의 진로 스트레스가 Big4 때보다 3배는 심한 것 같습니다. 유형이 좀 다릅니다. Big4에 있을 때는 '어떤 커리어로 가지?'라는 고민이었는데, 이제는 '40살부터 뭐 해먹고 살지?'라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보다 생계형에 가까워졌죠. 고민이 형태가 좀 달라진 이유는 3가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첫쨰, 로컬은 정글이라는 말이 확실히 체감된다.
Big4가 주는 안정감이란 게 있다고 말씀드렸던 바 있습니다. 그건 대기업의 이름 덕분이고, 내가 당장 직장에서 싫은 소리를 듣거나, 업무를 짬 때려 맞거나, 일부 부당한 대우를 당할지라도 버티기만 하면 나쁘지 않은 월급이 나온다는 것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동료 연차의 존재입니다.
Big4는 합격생들을 매년 많든 좋든 채용하기 때문에 연차의 간격이 매우 촘촘합니다. 여기서 연차는 휴가가 아니라 경력입니다. 1년차, 2년차, 3년차 이런 식으로 촘촘하게 메워져 있죠. 따라서 모르는 건 물어볼 수 있는 바로 윗년차 선배가 존재하고, 회사 욕을 술 먹으면서 할 수 있는 동기가 존재합니다. 엄청 큰 힘이 됩니다.
그런데 로컬은 동기가 없습니다. 같은 시기에 경력직 입사를 하는 사람이 존재할지라도 동기가 아니며, 같은 연차일 확률은 제로입니다. 보통 로컬은 연차가 높은 사람이 많으니 8~9년차 회계사도 젊은 축에 속합니다.
로컬은 보통 즉시 전력감의 회계사를 많이 채용합니다. 또한, 파트너들은 영업을 해오는 사람이지 자기 팀의 회계사들을 업무적으로 길러주거나 케어해줄 의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합니다. 아쉬울 게 없는 입장이죠. 사람은 언제든지 갈아 끼울 수 있고, 지금처럼 회계사보다는 회계법인에 힘의 무게가 기울어져 있는 시국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근속연수가 길지 않은 로컬 특성상 퇴사에 대해서도 무덤덤합니다.
따라서 일을 배우고 싶은 사람 입장에서는 적절한 중간 연차의 존재가 필요한데, 그건 운에 맡겨야 합니다. 있으면 정말 매사에 감사하면서 일을 배우시면 됩니다. 중간 연차의 존재도 운이고 그 사람이 성격 좋은 사람일 확률도 운입니다. 빅펌처럼 어느 본부, 어느 팀에 가든 바로 연차가 존재하고, 어느 정도 일을 가르쳐주는 것이 문화로 형성되어있는 분위기와는 다소 다릅니다.
결론은 로컬에서는 Big4만큼 동일하거나 근접한 연차의 회계사가 많이 존재할 수 없고 자체적인 교육 시스템도 없기 문에 적극적으로 교육을 시켜주는 문화가 아니며, 구조적으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일을 배우는 것 자체도 뭔가 Big4보다는 야생 같은 분위기가 강합니다.
둘쨰, 영업에 대해 자신이 없다.
저는 스포츠를 그닥 선호하지 않습니다. 건강관리를 위해서 헬스를 꾸준히 하지만 사람들끼리 모여서 같이하는 구기종목은 별로 안 좋아하죠.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한데 더운 걸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병적으로 더위를 많이 탑니다. 특히 볕에 계속 있으면 남들보다 독보적으로 열사병 증세를 보일 정도입니다. 사람들이 항상 저보고 살면서 이렇게 더위 많이 타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할 정도로 많이 탑니다. 처음에는 살이 쪄서 그런가 해서 수험생활 이후 급격한 다이어트와 헬스를 통해 정상 체중과 체형을 만들어서 유지를 하고 있는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보통 골프는 여름, 가을에 많이 치죠. 안 그래도 더운 여름을 싫어하는 데 저보고 여름에 나가서 골프를 치라는 말은 지옥을 보여주겠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진짜로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여름에 필드 딱 한 번 나가봤는데 9홀부터 말을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영업이라는 게 골프 치면서 이야기도 좀 하고 그래야 하는데 거친 숨 몰아쉬며 골프만 치러 갈 거면 뭐 하러 가겠습니까. 옆에 사람도 불편하게시리.
술은 좋아하고, 그럭저럭 잘 먹는 편이라고 들어서 차라리 영업을 술로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해 본 적도 있었습니다. 간을 어떻게든 강하게 만들어서 비벼볼까 하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이후 에피소드에서 후술할 일로 인해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는 것'과 '술로 영업을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레벨인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회계사분들이 공감하시겠지만, 회계사가 성공하려면 '일 잘하고 외향적이면 좋다'라고 합니다. 근데 문장을 보면 모순?이 보일 겁니다. 일을 잘하면서 외향적이기까지 하는 건 굉장히 어렵습니다. 특히, 회계사는 3~4년 공부하시고 합격해서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외향적인 사람이라도 3~4년동안 공부하다보면 어느 정도는 내향적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게 취직이 되고 원래대로 어느 정도는 돌아오겠지만 회계사분들 중에 외향적인 사람보다 내향적인 사람을 압도적인 비중으로 더 많이 만난 것 같습니다.
셋째, 모든 연차가 공통된 고민을 안고있다.
제 스트레스가 증폭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제가 생각하는 '40살 먹으면 뭐 해 먹고 살지?'라는 고민이
사회 초년생의 흔한 방황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길이 보이고, 뭐라도 되어있지 않겠냐는 생각이죠. 저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이 저만 있는 것도 당연히 아니었을 것이고, 선배님들 중 더 한 고민을 하시고 살았던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회계사 등록번호를 인증해야 들어갈 수 있는 오픈 톡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는 실무 관련 질문과 진로에 대한 고민, 개업에 대한 고민글이 하루가 멀다하고 꾸준히 올라옵니다.
특기 할만한 점은, 진로에 대한 고민과 개업에 대한 고민은 연차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1년차 회계사님들 등록번호가(아직 안 나온 분들을 포함해서) 대충 28000번대 후반이거나 29000번대 중반일 것 같은데, 고민하시는 분들 등록 번호보면 26000번대, 24000번대, 심지어 19000번대도 보입니다.
그러니까 연차가 올라가든 말든 사람 하는 고민이 다 똑같고, 지금 하는 스트레스에 대해 결론짓지 못한다면 연차가 쌓여도 똑같은 고민과 스트레스를 하게 된다는 말이겠죠. 지금 하는 방황은 사회 초년생의 방황이 아니라 해결되어야 할 문제(problem)라는 것입니다. 이걸 해결 못 하면 저는 인생 내내 여기에 시달리는 사람이 될 겁니다.
풀타임 회계사로 근무하기에 한계가 오는 시점은 40살 정도인 것 같습니다. 40살 정도 되면 빅펌에서는 디렉터가 될 나이죠. 연차로는 한 13~14년차가 될 것입니다. 파트너를 바라보거나, 파트너를 달지 못한다면 향후 행보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직급입니다. 로컬에 있는다고 상황은 다르지 않은 것 같은 게, 로컬에서도 굳이 영업을 안 하고 나이만 먹어가는 회계사를 풀타임으로 쓸 바에야 젊은 회계사로 교체하면 그만입니다. 로컬에서도 풀타임으로 계속해서 버티기는 좀 부담스러운 나이죠.
물론 한국이 고용관계가 미국처럼 유연하진 않으니 함부로 사람을 자르긴 힘들겠죠. 등록번호 9000번대인 선배님 한 분이 Director 직급으로 계속 근무하신다는 목격담을 타 Big4 법인 다니는 분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십중팔구는 어떻게든 내보낸다고 합니다. 허구한 날 새벽 3~4에 전화해서 갈구거나, 별거 아 걸로도 엄청 갈구고, 스탭들 보는 앞에서 그냥 대놓고 폐급 취급하면서 갈구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쫒아내려면 뭔들 못할까요. 그래서 회계사로 계속 살 거면 영업을 하던지, 인더, 공기업 등으로 빠지던지를 결정하고, 그게 아니면 회계사 이외의 다른 일을 찾아야 할 듯 합니다.
만약 제 사촌 동생이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도 다시 회계사 공부나, 전문직종의 공부를 해서 취업을 하고 싶어한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이 이야기는 꼭 해줄 것 같습니다. 능력대로 벌고 능력만 좋으면 갈 수 있는 진로는 정말 많은 건 사실이지만, 너는 취업하고 1년 후 부터 너의 진로에 대해 계속 스트레스 받고 고민하는 삶을 살아야 할 거라는 말입니다. 만약 이러한 고민과 스트레스를 싫어하는 사람은 회계사는 맞지 않는 듯 합니다.
계속해서 고민해 나가고, 방법을 찾고, 시도 해보고 하는 행동을 한 30대 중반까지는 해보려 합니다.
어차피 빅펌 딱지도 떼버린 김에 뭔들 못 하겠습니까? 제가 지금 엉덩이가 무거워진 나이도, 연봉도 아니니 할 수 있는 건 닥치는 대로 다해봐야죠 제가 지금 가진거라고는 젊은 나이에 따른 시간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실마리를 찾아 요새 여러 가지 도전을 해보고 있습니다. 만약 해당 도전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날이 찾아온다면 해당 이야기도 풀어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