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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Jul 18. 2022

햇빛 알맹이

태양이 깃든 맛


철 만난 매미마냥 참 많이도 운다 우리 조카 승현이. 돌 지난 걸음마로 되똥되똥 세상의 여름을 돌파해가자니 오죽 덥고 불쾌할까. 무더위에 땀을 쫄쫄 흘릴 때는 그 좋아하는 어부바도, 신기한 형아 장난감도 소용없이 징징 보채기만 하더니 포도 소리에는 그저 좋아서 입이 벌어진다.


승현이 포도 먹는 법은 나 어릴 때마냥 껍질만 골라 먹는 식이다.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포도 알을 꼬집듯이 떼내면 송이에서 용케 껍질만 딸려올 때도 있고 원치 않게 알맹이까지 뽑힐 때도 있는데, 이 녀석 실수로라도 알맹이를 그냥 입으로 가져가는 법이 없다.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포도껍질을 더 이상 씹기도 삼키기도 힘들 때까지 공들여 오물거리다가 보라색 침을 줄줄 흘리며 짓이겨진 껍데기를 끄집어 낸다. 그 모습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는지 보고 있는 어른들도 구미가 당겨 포도알을 쪽쪽 소리 나게 빨아먹게 된다.


탄생의 기억을 더 또렷이 간직하고 있을 아가 입맛이야말로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미식가 경지일 것이다. 우리가 주로 먹는 캠벨 포도는 과연 그 시큼새큼한 알맹이보다 껍질이 훨씬 더 달콤할 뿐 아니라 영양분도 많다. 특히 레스베라트롤이라는 성분은 노화를 방지하고 암세포 증식을 막는다 하여 포도밭 가꾸는 농부시인 류기봉은 포도 알맹이만 쏙 빼먹어서는 백 중에 칠십도 못 먹은 셈이라 탄식했다.


탐스러운 열매로 복된 감동 주지 않는 과실나무가 어디 있냐마는 포도처럼 이렇게 껍질까지 달콤한 과일은 드물다. 대개 과일 껍질은 외동아들같이 귀한 과육을 보호하기 위한 시골 노모의 손바닥마냥 두껍고 거친 것이 많은데 포도는 이마저 말랑하고 과즙이 풍부하다. 그래서 까치도 나비도 일하던 농부도 오며 가며 먹기에 좋다.


포도껍질은 더위가 무서워 직장인이 쉬고 학생들이 노는 시기에 갈자색으로 변한다. 가장 더운 날에 가장 진한 색으로 바꾸는 것이다. 사람 옷도 여름에는 햇빛을 반사하는 하얀 옷을 입지 열기를 고스란히 흡수하는 검은 옷은 피한다. 한여름 뙤약볕에 서 있다 보면 뜨끈뜨끈해진 검은 머리에서 열이 펄펄 나는 것도 못 견딜 일인데 포도는 더운 날을 골라 검붉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열심히, 온몸으로, 있는 힘을 다해 햇빛을 빨아들인다.


수확기 빗방울에 열과(裂果)하지 말라고 송이마다 종이봉투를 씌울 때 빼고는 땡볕 아래 짬 없이 치열했던 포도껍질에는 늘 이렇게 햇빛이 와글거린다. 제 가지들로 높고 낮게 층 이루어 그늘 한 점 만들 잔꾀도 없이 포도나무는 가지를 옆으로 멀리 내뻗기만 한다. 그 뻗은 가지마다 휘어져라 주렁주렁 송이들을 매단 채 새카만 차림으로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 요령도 없다. 그렇게 요령이 없어야만 포도는 달아지니까. 이글이글 태양이 타오를 때 포도 속 당도도 자글자글 졸아든다. 흐리멍덩하던 과즙을 바특하게 졸여 또렷한 달콤함을 일궈내려니 그렇다. 우리처럼 그늘을 골라 걷지 않아야, 손 부채 재게 흔들며 법석 떨지 않아야 비로소 포도 안에 가지런히 태양이 깃든다. 한 알 한 알 탱글한 햇빛 알맹이가 사람의 마을에서 수확되는 것이다. 그 햇빛 덩이를 따먹고 온몸 구석구석을 덥힌 우리는 환절기를 나고 찬 바람을 버티고 시련과 외로움도 견뎌낼 준비를 한다. 무거운 햇빛의 고됨을 찾아가 어깨에 짊어진 포도의 덕성이 이와 같다.


작열 속에 향과 자태를 바르게 하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자청했던가. 어리고 어리석을 땐 도망치는 날 많았고 오늘의 햇빛 아래에서도 종종 투덜댄다. 자기변명 같은 한 뼘 그늘을 찾고, 나태와 안일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얇디 얇은 핑계를 걸친다. 내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던 학창시절, 신념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던 젊은 날, 합리적인 전략을 골몰하던 광고쟁이로 살던 때 나는 나 자신의 권태에 대해 좀더 예민하게 굴었으면 좋았다. 차선책에 마지못해 수긍할 때 한탄 말고도 할 수 있는 걸 더 찾아야 했다. 이기심에 굴복하기도 조급함에 달뜨기도 했던 나의 초여름. 그날 그날 잘 제련된 인생의 햇빛이 나에게 쏟아지던 그때, 나는 나를 잘 벼리고 다듬어서 그 빛이 농도 깊게 스며들도록 최선을 다했는지, 지금이라도 그러고 있는지, 과연 한 송이 포도만큼은 자신이 없다.


올 여름 포도도 어김없이 껍질까지 달콤하다. 맛과 향이 얼기설기하지 않고 밀도 있고 치열하게 짜여진 햇빛의 맛이기 때문이리라. 햇빛 아래 농밀한 땀의 가치. 먹어서라도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하여 한 알 한 알 씹어 삼켜본다. 껍질까지 꾹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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