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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Jan 27. 2022

우리를 여기로 데려온 사람들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다리야. 할매들 오전부터 한의원 치료실에 누웠다. 천 원짜리 몇 장 들고 오면 침 놔주고 찜질해주고 하소연 들어준다. 살가운 간호사들, 아픈 자리 짚어주는 의사 양반 고맙다. 오며 가며 세월 잘 가고 어리광 부리는 재미도 있어 이틀이 멀다 하고 들른다.


할매들 병이야 약 먹고 주사 맞아 낫는 병은 아닐 게다. 엑스레이에 할매들 허한 마음까지 찍힐 리 없고, 청진기에 한숨의 사연까지 들릴 리 없다. 가족이래야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다 한집살이라해도 아침이면 세 살배기 손주까지 제 갈 길 가고 없다. 텅 빈 마을에 할매들만 남는다. 평생을 뭔가 키우고 길러온 아낙들이라 노는 법은 모르고 아파트 한 뼘 화단에 뭘 못 심어서 애가 난다. 같은 처지들끼리 웅숭그리며 해나 쬐는 건 취미가 없어 괜히 마른 자리나 한 번 더 걸레로 훔치다 나섰으리라.


한낮 놀이터엔 오갈 데 없는 갓난아기들만 가끔씩 등에 업히거나 유모차에 실려 나오는데, 그 햇것들과 그것을 키우는 풋것들이 봄바람에 해사하다. 무겁고 낡은 것은 조금도 묻어있지 않은, 거무튀튀하고 무료한 것은 본 적도 없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아기들의 말랑말랑한 손등에서는 복숭아 향이 나고 아기엄마들의 둥실한 허리에선 꽃나무 물 오르는 소리가 들릴 듯 하다. 할매도 한때는 그랬다. 자주 웃음이 터져 난처하던, 자식 크는 게 자랑이어서 세월 가는 건 안중에도 없던. 할매도 그 시절을 살았다. 토실토실하던 시절 다 까 먹고 이제 껍질만 남아선가. 마른 바람에 할매 빈 젖이 서걱거리는 것은.


어린 손주 어른다고 할매가 젖을 물렸다가 며느리가 기함했단 얘기를 들었다. 세정제로 씻고 살균기에 넣어 소독한 것이 다를 뿐 사실 실리콘 젖꼭지나 할매 젖이나 공갈인 건 마찬가지다. 할매는 그렇게 아기를 달래는 기분이나 느껴보고 싶었을까. 공갈인 줄 알면서도 노글노글했던 시절을 떠올려 보고 싶었던 걸까.


큰애가 전염성 수두에 걸려 어린 동생에게 옮길까 외가에서 일주일 지내게 했다. 아파트 옆 동이긴 해도 떨어져 지내야 하는 내 딸도 걱정이지만, 늙은 할매 할배 힘드실 것이 신경 쓰였다.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할매 수고를 치하하는데 이런 답이 돌아왔다.


"오랜 만에 아기엄마가 된 것 같아 재미있었어"


뭘 먹이나 끼니마다 고민이고 씻기고 재우고 놀아주고 시간 맞춰 약 먹이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녔을 텐데, 그런 걸 해본 지 너무나 오래된 할매에겐 그 일주일이 소꿉장난 같이 느껴진 듯했다. 이런 것도 딸이 돼서 효도라면 효도인가, 나는 딸을 낳아서 내 노릇에 보태는 중이다.


다시 일상은 분주하다. 이 집 저 집 알람이 울려대고, 싱크대에 물 마를 참이 없고, 옷장 문이 하루 몇 번씩 열렸다 닫혔다 한다. 숙제가 많고 일이 많고 시간은 모자란 이들이 빠져나간 집에, 놀이터에, 상가 벤치에 할매들이 나와 앉는다. 허리가 굽어지고 무릎이 꺾이고 어깨가 뭉개져서 이제 험한 일은 못하고 애기들 노리개 젖꼭지 정도나 되는 싱거운 삶. 젊은 날 묵직하고 요란했던 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노상 한 가득이던 짐들, 책임 무겁던 일들은 다 어떻게 마무리된 걸까.


그 매듭은 사실 우리다. 이고 졌던 꾸러미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여기 있다. 우리가 바로 그 생들의 일단락된 결과다. 그녀들은 묵묵히 끈을 잇거나 타래를 풀면서 여기까지 왔다. 거창한 무언가를 이룬답시고 소소한 것을 내팽개치지 않은 채 안전하게 우리를 현재로 데려다 주었다. 보다 평등하고 보다 편리한, 보다 견고하고 아름다운 지금으로 그녀들이 우리를 놓지 않고 상하지 않게 제때에 업고 와주었다. 거친 땅이 끝난 지점에 우리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고 거기서부터 우리는 우리의 쓸모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아이들을 어깨에 태울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을 미래로 데려다 줄 튼튼함을 상속받았고 또 계속해서 물려주게 될 것이다.


내 말랑한 허리가, 내 아기의 향기 나는 손등이, 토실한 팔다리와 촉촉한 볼이 다 거기서 나왔으니 할매는 이제 쪼그라들 수 밖에. 허리 다리 삭신이 아플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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