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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Apr 06. 2022

자유부인


둘째 어린이집에서 코로나 자가검사 키트를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개씩, 월요일 수요일 등원 전마다 검사를 권한답니다. 확진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으니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스크를 벗고 두 번의 간식과 점심 식사까지 해야 하는 원생들 입장에서는 과할 것 없는 처분이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아이 팔다리를 결박해가며 겨우 면봉을 코에 쑤셔 넣었습니다. 두 줄이 뜨더군요. 설명서에 적힌 10분은커녕 단 5초만에 빨간 테스트 선과 보랏빛 양성 반응 선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맙소사! 임신 테스트 때는 그토록 간절하던 두 줄이 무시무시하게 나타났습니다.


저는 음성이더군요. 남편은 두어 주 전에 완치를 했고요, 큰딸은 그 시각 이미 등교하고 없었습니다. 사실 자매는 나이 차가 많아 동선 겹칠 일이 거의 없습니다. 등하교 시간, 학원시간, 활동시간이 달라서 한 식탁에 앉아 밥 먹을 일도 잘 없지요. 게다가 덩치는 성인 여성만 하면서, 백신 접종은 하지 않은 큰애 감염이 우려돼 식기며 수건이며 각별히 신경을 써왔습니다. 일단 주변 소독을 한 뒤 여행 가방에다 큰애 일주일 치 짐을 쌉니다. 하교 후 테스트해보고 음성이라면 같은 아파트 옆 동 외가에 보낼 참으로 벌써부터 모의해둔 일입니다.


안 가는 것과 못 가는 것의 차이를 잘 모르는 둘째는 어린이집도 안 간대고 웬일로 엄마가 TV까지 틀어주니 신이 납니다. 과일 한 접시 내주고 저는 정육점, 약국, 채소가게에 후딱 다녀왔습니다. 우선 카레를 한 솥 끓입니다. 찌개 한 솥, 등갈비찜도 한 솥 해서 외가에 보낼 것까지 나눠 담습니다. 점심까지 배불리 먹고 산책하듯 보건소에 PCR검사 갑니다. 이튿날 양성 결과 문자가 날아오지요.


이런 감염병은 사실 엄마랑 아이가 한날 한시에 끝나는 편이 낫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첫 날부터 박력 있게 뽀뽀부터 빡 하고 시작한 건 아닙니다. 제가 자면서도 계속 마스크를 꼈죠. 허나 아이가 아프면 엄마에게 더 치대는 법. 안아주고 업어주고 마스크 뽀뽀도 하고, 마침내 모녀간 사랑의 결실인양 사흘째에 제게도 두 줄이 왔습니다. 남편이 죽 사다 나르고 설거지하고 손에 물 마를 새 없이 음식 쓰레기를 버려 주었습니다.


아이 열은 이틀 만에, 혼곤함은 나흘 만에 잡혔고, 심심함은 일주일 내도록 지속되었습니다마는 세 식구 추억 거리도 많이 생겼지요. 아빠와 블록 쌓고 카드놀이하고, 엄마와 공주드레스 차려 입고 무도회 열고, 만화영화 같이 보면서 노래 따라 불렀습니다. 인후통이 자심했던 저도 처방약 열 다섯 포를 먹고 나니 살만해지더군요. 다시 입맛이 돌았습니다.


일주일 뒤, 자가 검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산뜻한 등원길이었습니다. 그새 무르익은 봄이 동백 꽃을 바닥에다 부려 놓았더군요. 아이가 골라주는 대로 몇 개 받아 안고 집에 옵니다. 접시에 자작하니 물 받아서 옹기종기 담아두었습니다. 꽃잎 켜켜이 묻은 흙 모래는 털어냈는데 깊숙이 노란 꽃가루가 격렬한 키스 뒤 립스틱 자국처럼 어지럽습니다. 후줄근한 이별 따위 용납치 않겠다는 듯, 동백 여사는 진한 입맞춤으로 사랑하고 사랑 받던 날들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가장 화려한 차림으로 훌쩍 나무 아래로 뛰어내린 꽃덩이가 저는 어쩐지 자유로워 보입니다.


딱딱한 나뭇가지 그 끝을 겨우 찢고 비집고 나와 여린 잎 겹겹이 밀어낸 후 낙화한 것들. 일주일, 열흘 혼곤했을 그 날을 버티다 마침내 후련하게 떨쳐낸 이 꽃들이 나는 마치 병을 이겨낸 완치자처럼 보이네요. 슈퍼 슈퍼한 면역을 꽃 진 자리 열매로 남겨놓고 이제 이 붉은 상처 같은 영광은 천진한 자유를 얻습니다. 그 기쁨 치하해주고, 자축도 하면서 남은 감상을 다 하려 합니다.


완치자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전 국민의 삼 분의 일이 앓아야 수굿해진다던가요. 백신 맞느라, 깊게 얕게 앓느라, 각자 새 열매를 달고 희망을 남겨놓느라 모두들 애쓰셨습니다. 잘 살아남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매 먼저 맞고 발 뻗고 자는 세상에 온 걸 자축합시다. 비감염자 여러분은 계속해서 완강히 버티십시오. 부디 건강히 건강을 누리시길 빕니다.


기나긴 전시 상황 속 모두가 기특한 우리입니다. 그 부상으로 봄꽃이 지천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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