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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May 11. 2022

여탕보고서 2


비무장한 안식의 물가를 그린 전편을 기억한다면 오늘의 보고서는 주말의 여탕에 대해서다. 이날엔 아직 서열화되지 못한 하룻강아지들의 난입으로 평화롭다 못해 조금 쓸쓸하기까지 한 물가에 전혀 다른 파문이 인다.


그날도 주말이었고, 모처럼 막내를 데리고, 막내가 챙긴 인형 넷까지 달고 물가에 당도했다. 가슴 몽우리가 차오르기 시작하는 소녀들을 빼더라도 유치 덜 빠진 꼬맹이가 대충 예닐곱은 된다. 시간이 갈수록 자꾸 많아진다. 엄마가 애들 단도리 하는 소리, 애들끼리 조잘대는 소리, 눈치껏 물안경 꺼내 참방거리는 소리로 어수선하다. ‘물가’와 ‘아이’를 한데 놓고 읽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는 34도짜리 선선한 탕은 깊이가 1미터나 되어서 우리 둘째도 까치발로 겨우 머리 내놓는 신세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잠시도 눈 뗄 여유가 없다.


곧 세 자매가 탕에 들어왔다. 나중에 물으니 열두 살, 아홉 살, 다섯 살로 처진 눈매들이 판박이다. 막내 키가 작아서 언니 둘이 번갈아 동생을 업고 논다. 부력이 있으니 많이 무겁지는 않겠지만, 업힌 막내가 이래라, 저래라 솔찬히 부려 먹는다. 재미난 모습에 일곱 살 내 딸이 어울리고 싶은 눈치라 사정거리 안으로 밀어 넣으니 그 다음은 자기들끼리 척척. 나이를 묻고 놀이를 정하고, 보기만도 흐뭇해서 또 눈을 못 떼겠다.


잠시 나가 초콜릿 음료 네 개를 사온다. 애들을 물밖으로 나오게 해 한 켠에 조로롱히 앉혔다. 어린 순서대로 덥석 캔을 쥔다. 맏언니까지 마시기 시작하는 걸 보고 나는 한증막으로 향했다. ‘여자 넷이 모이면 무서울 게 없다. 남자 넷이 모이면 무서운 일이 생기지만.’ 새 작품 구상으로 중얼거리다 나와보니 애들 있던 곳에 아무도 없다. 가까운 쓰레기통에 빈 캔만 얌전하다. 원래 놀던 탕에는 사람이 더 늘었는데, 도레미파 덩치 쪼로록한 네 명의 무리가 없어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자세히 보니 구석자리에 세 자매 중 막내와 내 딸만 난간에 걸터앉아 물속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다리만 참방대고 있다. 한참 더 지켜봐도 큰언니, 둘째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막내 돌봐 줄 이가 생겼다 싶자 언니들이 얼른 자리를 뜬 게 아닌가 한다.


누나 넷 있는 집에 막내로 태어난 남편 얘기를 들어봐도 그렇다. 나이든 어머님 대신 큰누나가 막내를 업고 다니다 시집 가면 둘째누나 차지가 된다. 둘째가 외지로 취업이 돼서 이젠 셋째누나가 남동생 밥을 차린다. 샘 많은 막내누나는 같이 크다시피 해도 목돈 들어갈 일이 생기면 남동생 용무가 먼저였단다. 예전처럼 아들 딸 차별이야 덜해졌겠으나 여전히 장녀는 살림 밑천이요, 기대치고 본보기다. 맏이로 자란 내가 모성의 반쯤을 숙명으로 자처한 걸 떠올려, 일곱 살 터울 진 우리 큰딸에게는 양보를 따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건 배운다고 알고 감춘다고 모를 일이 아니다.


맏이는 어린 동생이 떼를 쓰겠다 싶으면 얼른 손을 잡고 엄마보다 몇 걸음 앞서가 버린다. 이제 막 밥숟갈을 뜨기 시작한 엄마를 대신해 식당 화장실에 동생을 데려가기도 한다. 가끔은 애 아빠보다도 미덥게 여기는 나를 보면서 큰애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면목이 없다. 여성의 노동력이 또 다른 여성, 대개는 더 하위 여성의 것으로 매워지는 것이다.


급할 때 달려오는 친정 엄마, 살림 도와주는 이모님, 가족 대신한 요양보호사, 모두 같은 식의 돌려막기다. 신용카드 결제일이 다가와 다른 카드 대출로 연체를 막는 식이다. 도산하기 딱 좋은 악순환이지만 친정 엄마나 장녀는 부도를 내지 않는다. 스스로를 조금씩 갈고 깎아서 그 자리에 꼭 맞게 몸을 끼운다. 어쩌다 억울함을 토로하는 날도 있는데 내 경우는 사십 년 중에 하루였다. 다음 사십 년이 오기까지, 아마도 일전에 성냈던 게 미안해 나는 내 등을 더 납작 엎디어 가족 일의 기우뚱한 부분마다 굄돌이 되려 할 것이다.


한참만에 세자매 중 맏이가 놀던 곳으로 돌아왔다. 뻔한 공간 안에 숨어 쉴 곳이란 게 있을 리가. 세 자매를 데려온 할머니는 자신의 때를 불리는 데만도 지친 기색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앉혀 가져간 장난감을 갖고 놀게 했다. 그리고 애들 할머니를 찾아가 등을 밀어드렸다. 노인의 팔이 허공에서 성호경을 그었다. 그럴 만한 일이 못 되어서 손목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아이들 뒷모습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 뜨끈한 물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목까지 차오르는 빈틈없는 수압이 느껴진다. 올가미 같기도 하고 포옹 같기도 하다. 이 단호한 압력에 길들여진 태아는 자궁 밖에서 허전한 중력을 견디질 못해 하므로 속싸개로 똥똥 싸매두라고 한다. 답답한 포옹일지 언정 그것에서 안정감을 느낀다면 조금 죄이는 편이 나으니까.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 살아가는 여자들의 물가. 기어코 깊숙이 물에 잠겨 수압이 옥죄는 걸 만끽하는. 그리고 수행하듯 때를 벗겨내고 벌 받듯 온몸이 벌개져서 돌아가는, 우리들의 여탕. 그 두 번째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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