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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May 19. 2022

맨밥


첫 책이 나왔다. 내 이름 석자가 표지에 박히고 개인 프로필로 텍스트가 시작되는 책. 게다가 수필집. 친정 엄마 다친 얘기며 애들 젖 물리던 얘기, 별일 아닌 걸로 큰애 야단쳐 놓고 가슴 쥐어뜯던 얘기까지 그야말로 오만 TMI가 방출되었다.


일상 너머에 내재하는 세계와 인간 존재의 보편성을 탐색하기 위한 논리적 언어수행을 산문이라 한다지. 하지만 번듯한 수행 한 접시를 내어놓으려면 일단 소매 걷어 부치고 투박한 일상부터 주물럭거려야 한다. 흙 묻은 껍질 씻고, 단단한 꼭지 떼고, 쓰고 떫은 것 내버리고, 미끌거리는 것 뜯어내는 여타의 과정은 조밀하다 못해 좀스럽고, 평범하다 못해 남루하다. 어릴 적 나는 점심 뭐 먹었냐 묻는 친구 말고 밥 때를 거르며 철학을 논하는 선배를 쫓아다니는 쪽이었다. 사랑을 하려거든 그렇고 그런 뻔한 연애 말고 비극적 새드엔딩을 갈구하던 철부지였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좀스러운 일상을 주물러 글의 접시에 올려 놓는 일을 하게 될 줄이야.


최근 어느 명문의 작가는 밥도 아니고 팅팅한 라면 한 그릇으로 짧은 글 한 편을 펼쳐 내었다. 파 한 줌, 계란 한 알 들지 않은, 보기만도 그저 그런 인증샷도 함께 올렸다. 예쁘고 귀하고 자랑스러운 것 넘쳐나는 SNS 게시판에 너무 볼품없어서 눈에 띄는 라면 한 그릇이 대가의 문장 안에서 얼큰한 사유로 풀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흡사 예수님이 닦아주었다는 베드로의 발처럼, 그 대상이 하찮을수록 감상의 풍미가 더 극대화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라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새삼 내 책을 다시 읽어보니 자잘한 일상의 편린들이 어찌 이리도 많은 건지.


수필 계간지를 읽으면서 베스트 작품 열 편 고르는 일을 하게 된다. 그렇게 올해의 작품상을 받은 적 있는 나는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라도 성실한 독자의 몫을 다하려는 바, 나름대로 세운 선정 기준은 다음과 같다. 문장이 아름답거나 삶이 아름다운 것. 아름답다는 의미가 고작 커다란 눈이나 오똑한 코 따위를 뜻하는 게 아닌 줄은 아실 터,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설명하자면, 이를테면 용기 같은 것이다. 가령 늘 생각은 하지만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던 걸 한 번 해보는 용기. 글로는 수백 번 휴머니즘을 행하지만 선뜻 몸으로 표현하기는 쑥스러운 걸 시도해보는 일. 그게 단지 작품에 써먹기 위해 부려본 일시적 이벤트라 하더라도 그 글이 허구가 되지 않도록 노력한 인문학도의 가상함이 느껴질 때, 나는 담음새가 조금 어색해도 재료가 좋은 작품으로서 상위권에 올려 둔다.


삶이 글이 되기 이전의 것은 이 사이에 낀 고춧가루만큼이나 적나라하다. 가령 타성과 고정관념, 오래 묵은 편견과 딱 들어맞게 자리잡아버린 부조리 같은 것. 그 적나라함을 못 견디는 이들이 있어 문학이 여기까지 온 것일테다. 그 적나라함을 그대로 버려 두고 무심히 또 다음 적나라함으로 넘어가는 것, 그래서 결국엔 적나라한지 아닌지도 모르고 살게 되는 것. 바로 그런 걸 참을 수 없어서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이 짓을 밤새 머리 쥐어짜내며 하고 또 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도 알 길 없는 각자 생의 속살을, 기미와 잡티, 뾰루지로 얼룩덜룩한 민낯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부터가 앞서 말한 아름다운 용기다. 벽처럼 단단한 타성을 무너뜨리고 밖을 향한 창을 내는 것. 그 창으로 내가 밖을 살피듯 밖에서도 내가 보이도록 투명하게 닦아 놓는 것. 여기서부터 이미 인문학도의 가상함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누구도 궁금해 않던 어제까지의 비밀이 수필 한 편을 통해 세상으로 타전된다. 사실 비밀이랄 것도 못 되는 뻔한 희로애락과 조잡한 일희일비가 식자재로 들려 나온다. 그것을 의미 있게 단도리해, 반성과 깨달음으로 끓이고 졸여 원재료의 맛과 영양이 의미 있게 남은 요리 한 편으로 문학이라는 접시 위에 담긴다. 누구든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어주시길. 요란스럽게 혀를 굴리는 소뮬리에처럼 마음껏 맛보고 음미해주시길.


그러다 목구멍이 찔리고, 입안 볼 살이 씹히고, 사레에 걸려 기침을 켁켁, 눈물까지 찔끔, 재채기가 나와 온 야단법석, 그렇게 당신의 일상에 별스러운 소요를 일으킬 수 있다면 내 글은 요깃거리 이상의 뭔가를 해낸 셈이 된다. 문자를 읽고 서사를 이해하는 만족감 이상의 무언가. 숨이 오가는 길, 음식이 오가는 길, 그렇다고 딱 정해진 그 길 사이를 건드려 통증으로라도 거기에 무엇이 있노라 알게 되는 일. 밥만으로도 사색만으로도 살 수 없는 경계의 영토를 늘여가는 것만이 우리를 더 용기 있고 의연한 인간으로 자라게 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문학이 생 안에 있다지만 밥그릇 가장 가까이에 단연 수필이 있는 듯하다. 허여멀금한 얼굴을 하고 상온에서 덤덤히 마르고 물러가는 맨밥 옆에 말이다. 손 써볼 수 없는 낱낱의 우연과 현상 앞에서 수필가라는 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는 대신 그 밥을 씹으며 밥의 일을 생각한다. 어제까지 비밀이거나 또는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이치를 생각한다. 깨닫는 것이 있어 누군가의 허기가 면해지길. 아니면 누군가 본인의 허기를 알아차리는 데 도움이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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