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왜 이렇게 잘 참을까요?”
“참는 건 누구한테 배웠을까요?”
지난여름, 소설 창작 강의에서 작가님이 내게 했던 질문이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떠올리며 쓴 소설이었다. 20년이 넘게 외할머니를 모시면서 생겨난 갈등과 그녀를 미워했던 내 마음을 기억하며 완성했다. 미움을 악착같이 캐보자고 썼다. 소설 속 주인공은 나와 닮았다. 주인공을 착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잘 참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들켰다고 생각했다. 참는 건 엄마에게서 배운 것 같다. 엄마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어렸을 땐 엄마가 쉬는 날만 기다렸다. 많은 이들에게 천사라는 소리를 듣던 엄마를 혼자 차지하기란 어려웠다. 엄마는 직장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집안일과 음식을 하며 풀타임 근무했다. 엄마도 휴일에는 자신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외출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얼른 엄마가 돌아와 나와 함께 드라마를 보기를 바랐다. 엄마 혼자 백화점에 가서 사 온 옷 말고, 엄마와 같이 쇼핑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머리로는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서운했다. 그때 어린아이의 바람과 엄마의 뒷모습을 여전히 붙들고 있었다.
“나는 왜 잘 참지?”
교실에서 내가 많이 허용적인가? 혹시 집요하게 혼내지 않아서 놓친 걸까. 그래서 애들이 변한 걸까. 조금씩 피어올랐던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나를 흔들었다. 그것도 아주 세차게.
올해 6학년 담임이다. 10월 중순부터 혼을 내거나 잘못을 지적하면, 서로 눈빛을 주고받거나 귓속말하는 무리가 생겼다. 나를 겨냥한 것 같은 아이들의 은어와 비웃음. 밖으로 내뿜는 분노가 아닌 은근한 미움이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나 역시 그 아이들을 향해 커지는 불신과 미움을 감추었다. 한편으로 매 순간 스스로를 검열했다. 지금 적절한 지도였나? 타이밍은 괜찮았나? 교육적인 방식이었나? 평소에 의식하지 않고 걷다가 갑자기 오른발이 먼저인가 왼발이 먼저인가를 따지며 사소한 거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었다. 흔들리지 않은 척했지만, 끊임없이 휘청였다. 교실에서 진을 빼고 오니, 편하게 쉬지 못했다.
원망은 엄마에게도 뻗쳤다. 왜 엄마는 혼자 다 하려고 자처했을까?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명절이면 외갓집 식구들 모두 우리 집에 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외삼촌, 외숙모, 사촌들을 위해 엄마는 새벽부터 갈비, 잡채, 온갖 전을 미리 해놓고 기다렸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외할머니를 모시는 건 우리 가족인데. 그동안 안쓰럽게만 느껴졌던 엄마의 행동이 이제 이해되지 않았다. 방아쇠수지증후군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손을 깁스했는데도 비닐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겠다는 엄마를 보고 답답함을 넘어 화가 났다. 평소에는 한 달에 한 번은 고향 집에 꼬박꼬박 내려갔지만 지난 추석 이후로 내려가지 않았다.
최근 몇 주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학교의 일을 잊어보려고 노래를 부르고, 춤추고, 친구와 시간을 보냈다. 글을 썼다. 명상 유튜브를 보고, 운동도 꼬박꼬박 나갔다. 주변 동료에게 털어놓고 학년 부장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한의원에 가서 보약을 지었다. 오랜만에 연극 치료 선생님께 연락해서 상담도 받았다. 물에 빠지면 힘을 빼고 가만히 있어야 저절로 떠오른다던데, 무서웠다. 아무것도 안 하면 더 심각해질 것 같았다. 이 상황을 벗어나겠다고 부단하게 발버둥 쳤다. 발이 땅에 조금만 닿지 않아도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심해처럼 느껴졌다.
‘뭘 또 해야 나아질까?’란 생각에 악착같이 달렸더니 지쳤던 걸까. 아무것도 하기 싫은 주말이었다. 배는 고픈데 침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배달앱을 켜고 하염없이 화면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도 모르는구나. 사소한 선택도 망설이는 스스로를 답답하다고 몰아세웠다. ‘지금 나, 괜찮지 않은 거 같아. 어떡하지.’ 두려움은 계속 몰려왔고 꼴깍 다시 침대 속으로 몸이 잠겼다. 내 모습이 조급한 것 같았다. 그 조급함 이면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한 발짝 나아가길 절실히 원했다. 그제야 먹고 싶은 게 명확히 떠올랐다. 엄마 밥을 먹고 싶었다. 따뜻한 밥과 엄마가 해 준 반찬을 입에 넣고 씹고 싶었다.
‘엄마, 나 요새 힘들어. 시간 되면 언제 한 번 올라와서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진짜 원하는 걸 적고 나서야 소리 내 울었다.
‘월요일에 올라갈게.’
밖에 나왔을 때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며칠 전 전화로 “그러니까 엄마도 잘살고 잘 먹고 있으라고. 걱정시키지 말고. 나도 여기서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까.”라고 쏘아붙였던 게 떠올랐다.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블록은 온통 노랗고 붉었다. 눈물을 감추려고 땅을 보며 걸었다.
그날 저녁, 연극치료 선생님을 만나 두 번째 연극 작업을 했다. 나의 뿌리를 들여다보았다. 혼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모습은 아빠와 닮았다.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일상을 보내는 건 엄마가 가진 힘이었다. 지난 명절 부모님에게 실망했던 일이 있었다. 이후 그들과 닮은 내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곡했던 시선을 돌리자, 이미 땅에 발을 단단히 디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잘 참는다는 건’ 일상과 교실에서 내가 가진 자원, 튼튼한 뿌리였다.
엄마가 올라왔다. 엄마는 고기를 데우고 반찬을 옮겨 담았다. 함께 밥을 먹었고 산책했다. 그간의 일을 말했다. 어떤 모습에 실망했었는지. 그리고 이제는 두 분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것도.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집에 내려갈 거라고도.
나는 거기 항상 있을 테니까, 편할 때 언제든 내려와.라고 엄마가 말했다.
이번 주도 변함없이 교실에서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의 반응에 덜 민감했다. 스스로 한 선택을 존중했다. 흔들려도 괜찮다고, 휘청여도 된다고. 그렇게 춤추며 한 발짝씩 나아갈 거라고. 아빠와 엄마를 닮은 절실하고 단단한 뿌리가 나에게 있다고 다독였다.
냉장고를 열었다. 두부와 호박을 넣어 된장찌개를 끓였다. 든든하게 남아있던 반찬도 꺼냈다. 깻잎장아찌, 순무 김치, 고추장 멸치볶음, 콩조림, 볶은 김치. 조금씩 내어 접시에 덜었다. 뜨거운 밥에 된장찌개랑 순무 김치를 한 입 먹었다. ‘이번 주도 지나갔다.’는 안도를 입안에 한참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