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당신이 라면을 넣어 끓였던 냄비가 작품이 된다면 어떨까.
재래장터 한구석에 내던져진 소쿠리가 예술이 된다면 어떨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아 쓸모없으면 버려지고, 버려진 쓰레기 주제에 추하다고 무시당하는 모든 존재들. 쓸모없다, 추하다, 더럽다 등의 수식어를 지닌 존재들에게 ‘사랑스럽다’라는 새로운 눈길을 준 작가가 있다. 바로 최정화 작가.
그는 추하다고 버림받은 것들을 오히려 작품의 재료와 소재 자체로 사용한다. 남들이 촌스럽다고 무시하는 존재들을 사용해, 쓸모없음을 쓸모있음으로 치환하는 예술을 펼쳐나간다.
여기, 위로 기다랗게 뻗어있는 탑들이 보인다.
알록달록 형형색색 다양한 물건을 쌓아 올려 만든 1백46개의 꽃탑.
꽃탑이 이루는 영험한 분위기의 신전 같기도 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개성을 지닌 탑들이 고고하게 서있다. 마치 자신의 위신을 자랑하는 듯한 이 탑들은 모두 버려진 가구, 폐고철, 그릇, 플라스틱 바구니 등 지구촌에 있는 모든 흔한 일상 용품이다. 그 외에도 청동기 시대 그릇, 바닷가에 버려진 스티로폼, 교통 표지판, 18세부터 모은 자수 베개, 샴페인 병 파편, 복덕방 의자, 청계천의 밀대 등이 꽃탑을 이루고 있다.
버려진 것들, 쓸모없던 것들이 이루는 이 꽃숲을 보고 있자면 하나하나의 탑을 쌓아올린 순간이 보인다. 맨 하단의 물건부터 가장 꼭대기의 물건까지 쓱 훑다 보면 마치 관람객 스스로가 탑을 쌓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마치 하나하나의 돌탑을 쌓듯. 한 움큼 올릴 때마다 정성을 다해 기원했을 과정을 생각하며 관람객은 각각의 오브제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추하다고 불리던 오랜 기다림 끝에, 물건들은 결국 의미 있는 존재로 빛이 난다.
오히려 최정화의 꽃탑이 특별한 것은 그 추함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저마다의 사연과 각자의 기구한 삶의 형태가 ‘꽃’으로 발화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인내했을지, 보는 이가 바라보며 가슴 깊이 애틋해지기 때문이리라.
길을 걷다 보면 버려진 물건이 말을 걸어오고 따라온다.
나는 그것들을 모아 쌓을 뿐이고 관객들이 알아서 각자 기억을 가져가면 된다
최정화 작가 인터뷰 (매일경제)
최정화는 그의 예술이 한 사부로부터 비롯됐다고 말한다.
1986년 그는 북적북적한 시장통에서 사부를 처음 만난다. 그의 ‘사부’는 다름 아닌 한 의자.
등받이와 방석이 없는 나무 의자에 다리가 없는 플라스틱 의자를 연결해서 만든 의자다.
그에게 영감을 주는 사부와 같은 존재는 의자뿐만이 아니다. 가게나 손수레에 이리저리 쌓아 올려진 잡동사니들, 남들이 촌스럽고 추하다고 거들떠도 안 보는 물건들이 모두 그에겐 가치 있는 존재들이다.
이 모든 것들을 사부라 칭하는 최정화의 언어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위의 ‘사부’ 의자, 혹은 앞서 언급했던 꽃탑은 오랜 시간 바라보고 있으면 왜인지 인간 같기도 하다. 버림받아 상처 입은 어린 존재들이 손을 맞잡고 다시 새롭게 조화롭게 가꾸어나가는 세상처럼 보인다. 추한 모습은 추한 대로, 부족한 모습은 부족한 대로.
각자의 모자람이 모여 새로운 형태가 되고,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빛을 발한다.
이름 없는 하찮은 존재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명칭으로 재탄생시키는 자신의 행위를, 최정화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내 작품의 근원은 사랑이다.
가치 없다고 버림받고 무시당하던 ‘눈부시게 하찮은’ 재료들을 모아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싶다.
최정화 작가 인터뷰
최정화가 얘기한 눈부시게 하찮은 존재들은 그의 손길, 눈길 그리고 사랑을 거쳐 민들레로 피어오르기도 한다.
높이 9미터, 무게 3.8톤의 이 특별한 민들레는 쓰다 버린 냄비와 프라이팬, 플라스틱 바구니, 그릇 7,000여 개로 이루어졌다.
멀리서 보면 햇빛에 찬란한 모양새로 반사되는 아름다운 조형물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물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하찮지만 아름다운, 추하지만 사랑스러운 민들레 홀씨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네 인간의 이야기가 아닐까.
(작품명에 꽃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인간을 향한 것이다.
눈부시게 하찮은 것과 꽃을 볼 때 마음이 둘 다 같다.
거룩한 일상을 꽃으로도 표현했다. 처음에는 쓰레기를 두고 꽃이라고 했다.
난지도를 멀리서 보며 꽃밭으로 생각했고
그동안 만든 많은 플라스틱 작품을 인공의 꽃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니다 세상만사가 다 꽃이다 싶었다.
김춘수의 ‘꽃’처럼 호명하고, 보고, 그다음 마음으로 안아주는 것.
그러면 근본적으로 훌륭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최정화 작가 보그코리아 인터뷰 中)
어쩌면 인생은 거대한 분리수거장 아닐까 싶다. 쓰이고 버려진, 버려지는 순간조차 구분 지어지는 운명에 놓인 인생
진절머리 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쉬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추한 것은 추한 대로,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참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낱 쓰레기에 불과한 듯한 먼지 같은 인생이지만. 스스로의 추한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각각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애틋해진다.
스스로가 너무도 추하고 한심하다가도 괜스레 미치도록 더욱더 애틋해진다.
그 애틋함이 공감된다면 추하다고, 버림받았다고 하소연하기에 앞서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봐 주는 것은 어떨까. 자격지심과 낮은 자존감으로. 때론 외로움으로. 온갖 감정에 휩싸여 스스로가 스스로를 버리지 않길 바란다.
오늘도 세상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을 모든 눈부시게 하찮은 존재들에게 이 말을 전한다.
언젠가는 꼭 꽃탑을 쌓아 민들레를 피어 올리리라!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고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中
글 | 김은강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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