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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울 Jul 09. 2021

묵은 것이 아름답다(3)

(3) 군산의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들'

  군산에 ‘이성당’만 있는 게 아니다. 오래되고 아름다운 볼거리가 군산항 주변에 많이 남아있다. 옛 군산세관,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옛 미즈상사 건물, 옛 식량창고 건물(옛 장미동(藏米洞) 장미갤러리), 일본식 게스트하우스 여미랑, 일본식 사찰 동국사, 신흥동의 일본식 주택, 일본식 상점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근대역사문화거리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은 이성당 빵집을 중심으로 걸어서 5~10분 이내다.      

  군산의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1937~38년 일간지 연재)에 잘 그려져 있다. 소설 속의 거리는 민초들의 애잔한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서글픈 거리다. ‘탁류’는 1930년대에 일확천금을 노린 투기꾼들이 몰려들었던 ‘미두(米豆)거래소’(쌀 선물거래소)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과 사랑, 사회상을 군산 앞바다의 탁류에 빗대어 소상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 속 은행 건물은 ‘근대미술관’(옛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과 ‘근대건축관’(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라고 알려진 이성당은 포장지에 ‘1945’라는 숫자가 잘 보이도록 배치했다. 1910년부터 45년까지 이즈모야(出雲屋)라는 일본인 빵집과 레스토랑이 있었던 자리라고 하니까, 이성당 자리가 명당은 명당인 모양이다. 1945년에 시작한 빵집이 여전히 핫플레이스인 비결은 뭘까? 야채빵과 단팥빵 덕분이다. 특히 야채빵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야채로 속을 만들어 맛있는 빵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고로케처럼 기름에 튀겨서 고소한 맛을 내는 것도 아니고, 오븐에 구워내는 것인데도 인기가 있다. 단팥빵은 밀가루 반죽이 아닌 찹쌀 반죽으로 만든다. 속에 들어가는 단팥도 아주 듬뿍이다.

  가성비 최고 메뉴는 6천 원짜리 조식 세트다. 1980년 무렵에 개발된 메뉴로서, 당시엔 2천5백 원이었다고 한다. 커피, 우유, 야채수프, 샐러드, 계란후라이, 토스트 다섯조각, 잼과 버터로 구성되어 있다. 조식 세트를 먹고 나오면 배도 부르지만, 고객을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오래된 빵집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이성당이 오래 살아남은 비결 중 하나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이성당은 ‘법고창신’, ‘입고출신’의 전형이다. 오래된 것이 새것이고, 묵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오래된 역사와 노하우를 바탕으로 새로운 메뉴와 맛과 서비스를 계속 내놓고 있다.      


  이성당을 나와서 동국사 방향으로 걷는 도중에 게스트하우스 여미랑이 보인다. 여미랑에 붙어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잠시 숨을 돌린다. 목조 건축과 다다미방, 작은 정원이 어우러진 일본식 게스트 하우스다. 방바닥이 뜨끈뜨끈한 온돌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다다미방에서 겨울을 보내기가 쉽지 않다. 겨울이 아니라면 일본식 다다미방 게스트하우스도 좋은 경험이다.     

  여미랑에서 나와 근처의 일본식 가옥과 상점을 둘러보는데 독립서점 ‘마리서사’가 보인다. 건물 정면 아래쪽에 동판으로 붙여 놓은 마리서사 표지판이 안개꽃처럼 잔잔하게 이쁘다. 동네의 작은 서점을 꾸려가는 게 얼마나 힘들까. 마리서사는 군산에만 있는 단독서점이 아니라 전국 네트워크로 연결된 책방이다. 잘 알다시피, 마리서사는 해방 이후 종로 3가에 있었고, 시인 박인환이 운영하던 서점 겸 문인들 아지트였다. 장마리 작가의 ‘선셋 블루스’나 ‘블라인드’가 생각이 나서 서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손글씨로 ‘11시 오픈’이라고 적혀 있다. 아쉽다.     

  금광동의 동국사길은 차가 교행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다. 골목 안으로 한참을 들어가서, 키가 큰 왕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일본식 사찰 동국사가 있었다. 1913년에 세워진 일본 조동종 소속의 금강사였는데, 1955년에 조계종 소속의 동국사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몇 개 안되는 일본식 사찰이고 에도시대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범종각의 종이 앙증맞게 소규모다. 산 속에 있는 절이 아니고 시내에 있는 절이니까 굳이 종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대웅전의 기와는 우리 것보다 훨씬 더 진한 먹색이었고, 지붕물매는 75도 각도로 급하게 떨어졌으며, 살짝 들려있는 한옥의 용마루와 달리 일직선이었다. 단순하면서도 권위적인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절의 소박하고 아담한 대웅전과는 많이 달랐다. 예불을 하는 대웅전과 스님이 머무는 요사채가 지붕 덮인 복도 건물로 연결되어 있었다. 스님들의 동선에 맞게 건물을 이어붙인 편리한 구조였다. 요란한 색상의 등이 잔뜩 걸려 있었고, 기와 불사를 하는 분들이 하얀 글씨로 적어 놓은 이름과 주소와 축원문에 눈길이 잠시 머물렀다. 우리나라 사찰의 부조화한 풍경을 여기 동국사에 와서도 볼 수 있었다. 꼭 이래야만 극락에 가는 걸까?     

  오리지널 군산을 보려면 군산을 떠나 선유도로 가야 한다. 군산(群山)은 산(山)이 모여 있다(群)는 뜻인데 항구도시 군산은 높은 봉우리가 없고 밋밋하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선유도 주변이 ‘군산’이었다. 60여 개의 섬이 아침 안개 속에서 무리(群) 지은 산(山)봉우리들처럼 보인다고 해서 선유도 주변의 섬들을 모아서 군산도(群山島)라고 불렀다. 세종대왕 시절에 금강 입구를 통해 내륙으로 들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선유도의 군산진을 지금의 군산항 인근 진포로 옮겼다. 새로 생긴 군산진에 밀려서 군산도는 고(古)군산도가 되었다.    

  

  고군산도는 난중일기에 등장한다. 백의종군 후에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쳤던 명랑해전(1597년 9월 16일) 후에 지친 함대를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목포, 영광, 변산, 위도를 거쳐 고군산도에 들어왔다. 11박 12일 동안 머물면서, 배를 수리하고, 병사들을 치료하고, 명량해전 보고서(장계)를 작성했다. 이순신 장군도 꼬박 사흘간 앓아누웠다.  선유도 안쪽으로 모래사장이 깊이 들어와 있고, 그곳에 배들이 정박해 있다면 서해바다에서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교토삼굴처럼 어느 섬 사이로도 쉽게 피해서 빠져나갈 수도 있다. 천혜의 수군기지였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도 이곳 고군산도에서 잠시나마 몸을 추스르고 재충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1597년 9월 21일. 맑다. (‘위도’를) 일찍 떠나서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렀다. 호남 순찰사는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갔다고 한다. 늦게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 22일. 맑았으나 북풍이 크게 불어서 그대로 머물렀다. 나주 목사, 무장 현감이 보러 왔다. / 23일. 맑다. 싸움을 이겼다는 장계 초본을 수정하였다. / 24일. 맑다. 몸이 좋지 못하여 끙끙 앓았다. / 25일. 맑다. 밤에 몸이 몹시 좋지 않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 26일. 맑다. 몸이 좋지 않아 하루 내내 나가지 않았다. / 27일. 맑다. 송한, 김국, 배세춘 등이 싸움에 이긴 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갔다. / 28일. 맑다. 송한과 정제가 바람에 막혀 돌아왔다. / 29일. 맑다. 장계와 정 판관이 도로 올라갔다. / 초1일(10월). 맑다. 아들 회를 보내서 저의 어머니도 보고 집안 여러 사람의 생사도 알아오게 하였다.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편지를 쓸 수 없었다. 병조의 역졸이 공문을 가지고 내려왔다. 아산 집이 적에게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되고 남은 것이 없다고 전하였다. / 초2일. 맑다.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이 마음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 초3일. 맑다. 새벽에 배를 띄워 변산을 거쳐 곧바로 법성포로 내려가는데, 바람이 부드러워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저물어서 법성포 선창 앞에 이르렀다.     


  군산 이성당에서 선유도까지 차로 25분이면 도착한다.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고 난 후 조금 있다가 선유도, 장자도까지 다리로 연결되었다. 배를 타지 않아도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된 후로 세 번째 선유도 행이었다. 처음에 눈이 왔을 때의 선유도는 최고였다. 봄에 조개를 주울 때도 바람은 불었지만, 날씨는 쾌청했다. 이번 여름 세 번째 방문엔 공교롭게도 장마 주의보에 걸렸다. 남들은 다 섬에서 빠져나오는데, 나는 차를 몰고 비를 맞으면서 섬으로 들어갔다. 무섭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행은 그런 것이다. 약간의 두려움은 여행의 맛이다.      

  선유도 주변의 섬들이 이제 다 다리로 연결되어 두루 둘러보기 쉽다.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대장봉과 망주봉을 하루면 다 구경할 수 있다. 선유도 등대에서 선유도 해수욕장까지 설치된 짚라인을 탄다면, 시원한 바닷바람을 안고 스릴있게 여름을 즐길 수 있다.


  고군산도는 파도와 태풍을 피하기에 좋은 지형이다. 과거의 기록을 보면, 중국과 한반도를 오가는 항로의 요충지였고, 고군산도에 ‘행궁’이 있었다고 한다. 왕의 무덤처럼 큰 고분이 있었는데 유물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의 사신을 고군산도에서 성대하게 맞았다는 문서도 남아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선유도에는 펜션과 횟집과 카페와 오락시설만 있고, 역사를 드러내는 문화유적지는 복원되어 있지 않다. 이순신 장군이 11박 12일 머물면서 아픈 몸을 추슬렀던 흔적을 기록해둔 유적지는 없다. 서남해안에는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 관련 유적지를 많이 발굴하고 복구해서 후손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군산시와 전라북도의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오래된 것을 아름답게 기록하고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은 우리들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라북도 한달 여행하기의 두 번째 장소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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