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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울 Jul 19. 2021

묵은 것이 아름답다(4)

(4) 전주의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들'

참으로 난감하다. 연간 방문객 숫자가 1,100만 이상인 도시, 누구나 잘 아는 도시 전주에 관한 글을 써야 한다니……. 피할 수 없으니, 일단 전주를 향해 떠났다. 번잡한 한옥마을을 피해 전주향교와 한벽루 사이에 위치한, 전주 천변의 조용한 한옥을 예약했다. 운이 좋았다.

  요즘 사람들에게 전주하면 떠오르는 게 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까? 비빔밥, 콩나물국밥, 판소리, 한옥마을, 풍년제과 초코파이, 맛과 멋의 고장, 뭐 이런 것들일 것이다.


  옛 문헌에 나오는, 옛 어른들의 전주에 대한 이미지는 어땠을까?

  “산과 들과 바다의 산물이 사시사철 풍요롭게 모여들고, 기후조차 온화 따뜻하여, 사람들의 성품은 명랑하고 낙천적이면서 남방인 특유의 개방적인 호방함을 넉넉하게 가진”, “만물이 은성하며 모든 것을 완비하여 원만하다”, “백대천손 길이길이 만세를 살아가기에 참으로 알맞고 넉넉한 곳”, “세월이 가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꿈의 꽃심을 지닌 땅”, 대하소설 『혼불』(제8권)에 나오는 온고을 전주에 관한 묘사다. 

  조선 시대에 전주가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는 것, 알고 있었나요? 전주는 마한 시절엔 원지, 백제 시절엔 완산이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757년) 이후부터 전주라고 불렸다. 전주는 후백제(892~936년)의 수도였다. 후백제를 물리친 후 뒤끝 작렬한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 따라, 고려 시절 내내 차별을 받았던 전주는 이성계의 등장으로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조선 건국의 시조를 배출한 고장이라는 의미에서 ‘풍패지향’으로 불렸고, 한양, 평양에 이어 3대 도시로 성장했다. 

  천년 고도 전주에는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전주 한옥마을의 경기전, 전동성당, 오목대, 전주향교 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을 먼저 소개해 보려 한다. 

  첫 번째로 소개할 곳은 홍지서림이다. 인구 63만에 불과한 지방 도시에 환갑이 다된 서점이 있다. 1963년에 생긴 서점이니까 오래 묵은 책방이다. 대견하고 고맙다. 남녀가 유별했고,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홍지서림은 남녀 중고생들이 눈을 맞추는 장소, 썸타는 장소였다. 홍지서림에서 만나 풍년제과로 이동하여, 소보루빵과 우유를 앞에 놓고 데이트를 했다. 이게 바로 1980년대 홍지서림과 풍년제과의 풍경이다. 전주에서 학교를 다닌 많은 소설가와 시인들의 작품이 탄생하는데 홍지서림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경영난에 빠진 홍지서림이 경매에 넘어갔을 때 양귀자 작가가 인수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지금도 경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암튼 중소기업형 독립 서점인 홍지서림이 대기업형 서점들의 공세에 맞서, 우여곡절과 부침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육십여 년을 버티고 살아남아 있다. 저녁을 먹고 경원동 옛 거리를 걷고 있는데, 불이 켜져 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일부러 이런저런 얘기도 물어보고 책을 한 권 샀다. 오래 잘 버티어 주기를 …….

  두 번째는 최명희 문학관이다.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국어 선생을 했던, 전주를 무척 사랑했던 작가다. 5부작(10권) 혼불을 마감한 후 지병으로 일찍 생을 마감한 작가를 기리기 위해, 선후배들과 기업, 자치단체가 뜻을 모아, 한옥마을 생가터 근처에 문학관을 세웠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꼭 한번 들려보기를 권한다. 글쓰기의 자세 등 느끼는 바가 하나 이상은 있을 것이다. “제가 자라던 도시 전주의 고풍스러움, 경기전의 몇백 년 된 기둥, 고목, 울창한 대숲, 그런 것들이 제게 세월을 몇백 년 단위로 느끼게 했는지도 모르지요. 3·40년대가 먼 시대 같지만, 우리가 모두 지금이라도 한 박자만 마음의 눈을 돌리면, 금방 발 디딜 수 있는 세계지요. 우리 삶을 이끌어온 도도한 정신의 맥을 거기서 찾아낼 수도 있구요.”(최명희, ‘한길’ 1991년 봄호 中에서). 

  세 번째는 마을을 지키는 오래된 나무들이다. 전주 동문시장 입구 근처에 서 있는 둥구나무 한 그루와 히말라야시다 두 그루가 오래된 동네 경원동을 지키고 있다. 삼백여 년의 세월을 버텨낸 느티나무(둥구나무)는 나의 어린 시절에는 경원동에서 남노송동으로 넘어가는 전라선 철도 건널목 옆에 있었다. 지금은 전라선 철길이 없어지고 임실과 남원으로 통하는 왕복 8차선 대로가 뚫렸지만, 여전히 넓은 그늘을 만들어 동네 어른들의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전주향교를 빛내주는 것은 오래되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들이다. 향교 정문을 지나 대성전 앞에 이르면, 키 큰 은행나무 두 그루를 만날 수 있다. 400년도 더 버텨낸 키 큰 은행나무는 대장군처럼 늠름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녀처럼 아름답다. 오백여 년 된 경기전을 지키고 있는 것도 고요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회화나무, 대나무 숲, 배롱나무들이다. 바로 길 건너 전동성당 앞마당에도 높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서 있다.

  네 번째는 서유구 선생 이야기다. ‘오곡도 구분 못 하는 자들이 양반이다.’ ‘지금 선비들이 공부하는 것은 흙으로 만든 국이요 종이로 빚은 떡이다.’라고 일갈했던 실학자 서유구를 전주에서 만날 수 있다. 향교를 나와서 우측으로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한옥과 상점들이 형성되어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연탄공장이 있어서 좀 우중충한 마을이었지만, 2000년 이후 한옥마을이 조성되면서 과거보다는 훨씬 더 예쁘게 단장되었다. 그 길을 따라서 가다 보면, 왼편에 ‘조선셰프 서유구’라는 간판을 단 2층짜리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칠십이 다 된 1833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던 서유구(1764~1845년) 선생과 조선 최대의 실용적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기념하는 건물이다. ‘임원경제지’는 양반이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면서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실용적인 지식(농사, 식용식물, 약용식물, 화훼, 과일, 옷재료, 기상, 가축, 어류, 요리, 건축, 의약, 건강, 공동체 예절 등)을 16개 분야로 나누어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해 놓은 책이다. 실제로 서유구 선생은 40대 초반 관직에서 밀려나 파주 장단면 고향에서 이십년 가까이 생활할 당시 몸소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고 요리를 해서 어머니를 모셨다고 한다. 한산 이씨로 알려진 모친께서 서유구 선생의 요리를 맛보시고는, "어미가 보기에 공의 재주 중 요리가 으뜸입니다"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다.

  '임원경제지' 중에서 요리에 관한 내용이 여덟 번째 정조지(鼎俎志, 솥과 도마에 관한 책)인데, 이를 번역하여 당시의 레시피를 복원해 놓은 책이 ‘조선셰프 서유구’(곽미경 著) 시리즈다. 서유구 선생의 또 하나의 역작은 ‘완영일록’(完營日錄)이다. 1833년 4월부터 1834년 12월까지 전라도 관찰사로 일하면서 업무 일지와 행정 자료를 남겼다. 전라감사로 있을 당시 흉년을 맞은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구황 작물인 고구마의 재배법을 다룬 《종저보》를 써서 보급했고, 농업용수를 끌어오기 위한 '수차'를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직접 농사를 지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실용적 행정이었다.


  다섯 번째는 한벽당과 한벽굴이다. 전주천이 내려다보이는 한벽당은 한옥마을을 찾아온 관광객이라면 필수 방문지다. 한벽당의 역사는 14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최담이 고향 전주에 내려와서 경치 좋은 절벽 아래, 전주 천변 바위 위에 세운 정자다. 워낙 전망이 좋아서 수많은 선비와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지어 걸었다. 요즘엔 전주 시민들의 여름 물놀이 명소다. 전주 시민이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에 전주천에 물놀이를 가서 한벽당 아래 물가에서 피라미를 잡고 물장구를 치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전주시에서는 1급수에서만 서식한다는 쉬리가 살고 있고, 수달이 발견될 정도로 전주천의 수질이 좋아졌다는 홍보를 하고 있다. 전주자연생태관을 한벽굴 근처에 새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 바로 앞 천변에 널려 있는 쓰레기들을 보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여섯 번째는 전주의 4대 문 이야기다. 전주에는 풍남문만 있고, 동문, 서문, 북문은 사라져 버렸다. 풍남문은 아주 근사하게 잘 복원되어 있고, 최근에는 전라감영도 복원되었다. 전주객사(풍패지관)의 서익헌 보수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아울러, 일제 강점기에 사라져 버렸다는 동문과 서문, 북문이 복원된다면 천년 고도 전주의 아름다움이 더 빛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서유구 선생의 부친(서호수)도 전라 관찰사였는데, 재임 시절에 전주성의 북문과 동문을 중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 동문, 서문, 북문을 모두 복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미 많이 변하고 훼손된 형편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북문 근처는 영화의 거리로서 비교적 활기를 띠고 있고,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서 복원이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동문이나 서문 주변은 도심이긴 하지만 슬럼화되어 있어서, 복원을 추진한다면 침체된 구도심의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곱 번째는 덕진공원의 연꽃 이야기다. 더운 여름이라면 무조건 덕진공원에 가봐야 한다. 어두운 진흙 속에서 고고한 꽃대를 높이 피워올린 화사한 연꽃을 보면 무더위로 지친 심신이 절로 가벼워진다. 드넓은 연못에 가득 핀 하얀색과 연분홍 꽃봉오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심청이도 생각이 나고, 잠시 속세를 벗어날 수 있다. 그 정도로 황홀하다. 

 여덟 번째는 동고사(東固寺)다. 통일신라 시절(헌강왕 2년, 876년)에 처음 지어졌고, 조선 말기(헌종 10년, 1844년)에 다시 지어졌고, 지금 남아 있는 가람은 해방 이후(1946년)에 세워진 것들이라고 한다. 전주 시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절이고, 바로 옆으로 이어진 능선만 넘으면 천주교 순교성지로 이어지기에, 여유가 있고 신체가 건강한 분이라면 꼭 둘러보기를 권한다. 전주에 가서 기린봉을 올라가지 않았다면 아직 전주를 다 맛본 것은 아니다. 북한산을 오르지 않았다면 서울을 다 음미해봤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동고사나 기린봉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인 만큼 가슴 속이 시원해진다. 

  전주 한옥마을은 묵은 것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대표 사례다. 지난 2000년 당시 김완주 시장 시절부터 한옥마을 가꾸기 관련 계획이 수립되어, 20여 년이 지난 지금 한옥마을은 계획 당시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커졌고, 방문객 숫자도 예상보다 많아졌다. 경기전과 전동성당, 풍남문, 남문시장, 전주향교, 오목대 등은 해마다 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품 관광지가 되었다. 오래된 한옥 군락지를 토대로 새로운 관광 아이템을 만들어냈다는 의미에서, 전주 한옥마을은 옛것을 토대로 새것을 만들어낸다는 법고창신의 대표적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들도 많다. 한옥마을이 고풍스럽고 단아한 맛은 사라지고, 지나치게 상업화되었다는 점은 누차 지적되고 있다. 국적 불명의 길거리 음식들이 난잡하게 벌여 있다는 점, 한옥 정원이나 한옥 식물원, 한옥 호텔 등 좀 더 품격 있는 아이템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 판소리 서예 등 문화 체험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


  런던이 런던 타워보다 높은 건물을 규제하듯이, 세계적인 도시들은 새로 건설되는 건물들이 중요하고 상징적인 관광 건축물보다 높지 않도록 도시계획에 반영하고 있다. 한옥마을 한복판에 볼품없이 높게 자리잡은 서양식 호텔 건물은 벌써 수십 년 전에 세워진 것이므로 어쩔수 없다고 치자. 하지만, 천주교 전주교구 건물 옆으로 멋없이 높은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짬뽕 도시를 만들 작정인지 궁금하다. 몬트리올의 경우를 보면, 올드 몬트리올은 전통 건물을 보존하면서 관광 중심으로, 뉴 몬트리올은 현대식 건물 중심으로 도시를 건설하면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있다. 담당자들은 다들 어디서 한눈팔고 있는 것인가? 오래되고 아름다운 마을을 지키는 자는 당산나무, 둥구나무다. 지자체의 공무원들과 지역 공동체가 바로 그 당산나무고 둥구나무다. 

  나도 그런 둥구나무의 한 가지만큼의 무게를 실감하면서, 1979년부터 비빔밥으로 전주의 맛을 대표해 왔던 가족회관에 들러서 허기를 달랬다. 그 밥심으로 여행의 피로를 털어내면서, 전라북도 한 달 여행하기의 세 번째 도시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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