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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살이 Apr 02. 2024

'당당'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니잖아요.

새치기를 하고도 당당한 이에게


 서울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어느 날, 직장에서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방향이 같은 동료들과 퇴근을 하던 길이었다. 지하철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고 계단을 내려가는 데, 그날따라 지하철을 기다리는 인파로 승강장 내부가 붐볐다. '오늘 대설주의보라 다들 대중교통 이용하나 봐요'라는 말과 함께 동료들과는 각자도생을 기원하며 승강장에서 헤어졌다. 


 나는 하차할 OO역에서 집이랑 가까운 출구가 있는 8-4 플랫폼으로 가기 위해 사람들 틈을 조심스레 비집으며 이동했다. 8-4 근처에 와서 그나마 줄을 설 수 있는 곳에 멈췄다. 내 앞에는 10명도 훨씬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한 줄로 서 있었다. 그 뒤에 줄을 서고 첫 번째 지하철이 들어왔다. 문은 열렸지만 내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그 안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내 앞에 서있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열차에 몸을 싣으려 하지 않았다. 곧 문이 닫히고 열차는 다음 역으로 출발했다. 


 잠시 후 두 번째 열차가 도착했다. 두 번째 열차는 문이 열리자마자 수박씨를 뱉은 것처럼 사람 한 명이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던 두 명이 그 열차에 구깃구깃 몸을 욱여넣었다. 까치발을 서고 손으로 지하철 벽면 어딘가를 짚고 팔을 바들바들 떠는 사람을 보니 안쓰러웠다. 퇴근길이 이렇게 고되다니 다들 먹고사느라 고생이 많구나.


 그때 카톡으로 다른 동료들의 지하철 승차 성공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부럽다며 축하 답장을 보냈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리고 오늘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지에 대한 기사 링크를 받았다. 내가 퇴근하기 10분 전, 오후 5시 50분쯤 바로 전역에서 도어문이 고장 나 승객들이 전부 하차했다는 내용이었다. 내일도 눈이 많이 온다고 했는데 오늘 사람이 많았던 이유가 눈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내일은 안 이러겠구나!


  그러는 사이 세 번째 열차가 들어오더니 속이 꽉 찬 만두 속을 보여주는 것처럼 문만 살짝 열어, 속을 보여주고 떠났다. 그 순간 내 오른편에 한 여성이 나타났다. 나는 스크린도어를 기준으로 왼쪽 줄에 서 있었는데, 그 여성은 양쪽 줄 중앙에 덩그러니 섰다. 그곳은 지하철 예절 상 하차하는 사람들을 위해 길을 터 놓는 공간이었지만 현재로서는 내리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크게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저 내 뒤에 서 있을 만한 충분한 공간이 없어서 내 옆으로 왔겠거니 생각하고 다시 내 핸드폰을 보았다. 


 네 번째 열차가 들어오는 데 오른쪽에 서 있던 그 여성이 슬며시 내 앞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때서야 '아,  새치기를 하려던 거구나' 깨달았다. 질서를 지켜달라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 말았다. 지하철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종종 욕을 하면서 싸우는 광경을 볼 때마다, '그냥 조금씩 양보하면 되지 왜 저렇게 다 큰 어른들이 공공장소에서 욕까지 하며 싸울까'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섯 번째 열차가 온 후 줄의 맨 앞사람이 타고 사람들이 조금씩 앞으로 이동하니 그 여성은 더욱이 내 앞에 자리를 확고히 하려는 심산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였지만 한 마디 양해의 말도 없이 어물쩍 새치기를 하는 그 사람에게 쉽게 자리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싸우기는 싫지만 이상하게 지는 것(?)도 싫다..;) 내가 인심 쓴다 한들 그 여성에게 '고맙다'라는 인사치레는 고사하고 그런 행동을 지속하는 데 보탬만 될 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을 먹고 그 여성에게 살며시 말했다.

 

"저기요~ 질서 좀 지켜주세요.."


그 여성은 내가 팔을 조금만 뻗어도 닿을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데 못 들은 척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귀에 이어폰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말했다.

 

"저기요~ 질서 좀 지켜주세요. 제가 먼저 여기와 있었어요."


그때서야 그 여성은 내쪽으로 고개만 살짝 돌려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먼저 타시면 되잖아요. 스세요!! 앞에!!!"


말을 끝냄과 동시에 나를 위아래로 흘기며 시선을 거두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어릴 적 했던 놀이 중 술래가 다가오면 '얼음'이라고 외치고 그 상태에서 움직이지 못했던 '얼음땡'처럼 내 몸과 정신이 얼어버렸다. 하지만 심장만은 더 크게 쿵쾅쿵쾅 뛰었다. 그럴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양심이 부족한 내 행동을 누군가 콕 집으면 그런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금세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과하거나 내 행동을 바로 잡는 게 정상이라 생각했는데, 그 여성은 당당하고 뻔뻔했다. 마치 새치기를 한 게 아니고 그냥 옆에 서 있었을 뿐인데 왜 나를 새치기하는 사람으로 만드냐며 언짢아하는 것처럼. 


 직장에서 보낸 고단한 8시간을 합친 것보다 더 고된 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라는 머릿속 물음에 나는 아무런 답을 찾지 못했다. 그때 여섯 번째 지하철이 '땡'하며 들어와 나는 얼음 상태에서 벗어났다. 내가 실수한 건가 싶어 정신이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상대가 먼저 타도록 어리바리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앞사람 뒤꽁무니에 바짝 붙어 앞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그 여성은 나를 앞지르지 않고 내 뒤에 섰다. 친절한 여섯 번째 열차는 나까지만 태워주었다. (하하하) 누군가는 유치하다고 흉보겠지만 속에서 쾌제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차의 문이 닫힐 때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저 먼저 갈게요^^' 인사(라고 쓰고 읽는 약 올리기)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간혹 타인으로부터 느낀 어떤 불쾌감들은 뒤돌아서면 '급한 사정이 있었겠지' 혹은 '생각해 보니 그 사람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라고 금방 사그라들곤 한다. 콩나물시루 같은 2호선 출근길 지하철에서 계속 밀치고 타는 사람들 때문에 나도 밀려서 내 앞사람 몸에 닿았을 뿐인데, 그 사람이 한쪽 어깨를 세게 들썩이며 나를 째려보면 그 순간 상당히 기분이 상하지만 내리고 나면 '그럼 뭐 그 사람이 바로 뒤에 있는 나한테 화를 내지, 누구한테 화를 내겠어'처럼 자연스레 소화가 된다. 


 하지만 그날 그 여성의 눈길과 말투, 표정 그리고 당당한 태도는 여전히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어디선가 또 새치기를 하면서 누군가의 기분을 어지럽히고 있을지 모를 그녀에게 '당당'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니라고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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