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나에게 결혼 소식을 알린 것은 어느 날 밤, 우리 둘뿐인 거실에서였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각자의 머그컵을 쥐고 있었다. 계절은 겨울이었고 우리가 사는 집은 창문이 커다랬다.
그녀는 지중해가 보이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이탈리아를 보면 부츠 모양이잖아. 거기서 구두 굽 부분 있지? 나는 그쪽에서 왔어.” 베니스나 피렌체, 로마나 밀라노는 알아도 갈리폴리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고향을 설명할 때, 그녀는 늘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참 예쁜 곳이지” 라던가, “언젠가 꼭 방문해봐”라는 상투적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지그시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는 눈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10대 시절 암이라는 병마에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 아버지를 오랫동안 미워했다고 했다. 아니, 가족 간 서로에게 참 많이 화가 나 있었다고 했다. 가끔 그녀는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찍은 빛 바랜 필름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며 그리워하곤 했다.
대학생이 된 그녀는 관광학과 언어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신청해 한 학기 동안 프랑스에서 공부해보기로 하고 부츠의 나라를 뒤로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요르단에서 온 남자를 만났다. 색은 달랐지만 그녀와 꼭 같은 곱슬머리였다. 왠지 접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부츠의 나라와 페트라의 나라에서 날아온 그 둘이 12월에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데는 꼭 4개월이 걸렸다.
세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그의 모든 것을 닮기로 결정한 그녀가 그의 종교인 무슬림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알아가게 될 때 즈음, 그녀는 자신의 뱃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작은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방학을 맞이하여 부츠의 나라의 구두 굽 부분의 작은 마을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지내던 때였다.
임신8주차, 8월 17일로 중절수술 날짜를 잡은 그녀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기도를.
“알라,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저는 아직 이 아이를 낳을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며칠 후, 동생과 함께 바닷가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운전을 하던 그녀는 별안간 심한 복통을 느꼈다. 그녀는 그길로 자연유산을 했다.
그녀는 나에게 이 이야기가 자신이 신을 믿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10대에 겪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신을 믿지 않았던 그녀가 철저하게 할랄 고기만 먹게 되고 매일 유튜브로 코란을 듣게 된 이유였다.
양손으로 머그컵을 감싸고 있던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EU 국가에 있기 위해서는 EU 시민권을 가진 배우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혼을 그와 하고 싶은 것은 맞지만 비자 발급을 위해 결혼을 하는 것은 조금 윤리적인 면에서 걸린다고도 했다.
나는 갑자기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중정이 있는 오래된 아파트 3층. 열쇠가 없어 큰 트렁크를 한 손에 끌고 문 앞에서 서성이던 흑발 곱슬머리의 그녀의 뒷모습이. 도움이 필요하냐는 나의 말에, 뒤를 돌아 지중해 마을의 보석처럼 반짝이는 웃음을 지어주던 그녀의 미소가.
이제 그녀는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녹음이 많이 보이는 독일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 각양각색의 산 속 집들이 따로 또 같이 지어져 있는 모습과 일정하게 푸르른 하늘이 매력적인 곳이다.
그곳에서 두 살배기 딸이 심하게 떼를 쓰면, 스물넷의 그녀는 가끔 바닥을 향해 무섭게 화를 내곤 했다. 어느 날은 아이가 유독 밥투정을 하며 칭얼거리고 집을 어지럽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식사를 하지 못했는데, 그 상황에서 이웃집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고, 어떤 물건을 빌리러 왔는데 혹시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아니요. 그딴 물건은 저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저는 지금 빌어먹을 밥도 못 먹고 애가 먹지도 않고 쏟은 밥, 바닥에 어질러놓은 장난감들을 치우느라 바빠 뒤지겠다고요!”
다행히 그녀의 이웃집 사람은 아주 다정한 아주머니였으며 육아에 있어서는 그녀보다 몇 년 선배였다. 이웃집 사람은 그녀에게 괜찮다고 해주었다. 내가 아이를 잠시 봐줄 테니, 앉아서 천천히 밥을 먹으라고 해주었다. 필요하면 낮잠도 자라고 말했다. 그녀는 정말로 오랜만에 한 시간 동안 방해받지 않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식사를 했다.
그녀는 이제 일년에 한번, 달력으로는 2월 즈음에 출장차 독일에 왔다가 자신의 집에 들렀다 가는 한국인 친구를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친구가 왔다 갔을 때, 공항으로 데려다 주는 길에 1차선으로 달리던 차의 뒷바퀴 타이어에 갑자기 펑크가 났던 위험천만한 에피소드를 떠올린다.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우버를 부르고 이별의 포옹을 하고. 웃기고 짜증나고 심각했던 순간들.
전염병이 세상을 지배한지 2년. 만나지 못한 시간 동안 그녀에게는 또 한 명의 아이가 찾아왔다. 사진 속의 자그마한 아이는 그녀와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같다.
나는 조용했던 겨울밤과 머그컵과 커다란 창문 사이로 휘잉휘잉 불던 바람소리를 떠올린다. “아마 너희가 아이를 낳으면 엄청난 아프로 머리의 아기가 태어날 거야.”
싸구려 테이블 보가 깔린 직사각형 식탁에 앉아 웃으면서 축하를 건네던 플랫메이트들의 모습도 떠올린다. 내 기억 속 모습을 비춰주는 카메라가 줌아웃을 하면, 그곳은 아주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따뜻한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