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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래불사춘 Jul 05. 2021

우리집아, 너에게도 이름을 지어줄게

작명 요정 딸아이의 도움을 받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이제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다시 생각한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김춘수 시인은 한때 국회의원이었다. 당시 시대상황과 여러 가지 이유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의원직을 맡았던 것 같은데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지만 그에게는 다소 고통스럽기도 했나 보다. 역시 사람은 자기한테 맞는 옷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이름을 지어주는 것.


첫째 딸아이가 태어나기 일주일 전쯤. 아내와 나는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아이의 이름을 짓게 되었다. 아들이었다면 돌림자를 중시하는 가풍에 의해 작명의 범위가 제한적이었겠지만 딸은 자유롭게 짓는 것이 친척 일가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였다. 그래도 확정하기 전 구순이 넘으신 할아버지의 형식적인 동의는 구해야 했다.


이름에는 유행이 있다. 간혹 예상이 빗나가는 경우가 있지만 어떤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의 나이에 대한 정보를 알기 전에 대충 그의 연배를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요즘 유행하는 이름에도 모범적인 답안이 있었다. 우리는 작명 흐름의 정점에 있는 몇 가지 글자는 과감히 빼기로 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많은 아이 가운데 하나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중성적이면서 외국인이 부르기 쉬운 이름을 짓는 유행의 흐름은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고려할 것은 내 성의 발음이 무거운 편이라 이어지는 음은 가벼운 것이어야 하고 듣는 사람이 한 번에 정확한 이름을 인지하게끔 간결하기를 원했다.

우리는 노력했다. 한글의 14개의 자음과 11개의 모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조합을 다 시도해보았다. 압축되는 지점이 몇 있었는데 첫 음은 'ㅇ'이 들어가는 것이고 둘째음은 받침이 없는 걸로 짓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글 이름을 먼저 생각한 후 한자 뜻을 이름에 맞추기로 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이름 그 자체만을 고민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 혼자 원했던 부분은 아이의 이름이 조선시대 문인, 문장가 느낌으로 지어지길 바랐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한국사 공부를 할 때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위인들은 멋진 이름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 이름들을 암기하기 위해 수백 번씩 되뇌며 읊조렸던 것이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들여 단 하나의 이름에 서로 동의했다. 부모로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 행위를 완성한 것에는 상상과 기대 이상의 희열과 감동이 있었다. 만족스러운 이름의 탄생과 더불어 '기쁨을 부른다'는 적절한 의미의 한자어도 찾았다. 집에서, 직장에서 시간만 나면 수십 번씩 빈 종이에 아이의 이름을 한자로 적어보곤 했다.


올해 아이는 여덟 살이 되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동안 아이의 예쁘고 희소한 이름은 줄곧 우리 부부의 자부심이었다. 우리의 작명 노력이 아이에게 전해진 건지 아이는 한글을 떼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 사물의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했다.




피천득 선생은 생전에 밤이 되면 아끼는 인형에게 안대를 씌워 줬다고 한다. 인형도 잠을 자야 하니까. 위대한 문학가다운 발상이라며 감동했던 적이 있다. 아이의 마음을 노년까지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딸아이가 처음 이름을 짓기 시작한 것도 역시 가까이 품고 있는 인형들이었다.


토토.

딸아이는 작명 센스가 있다.

고 생각한다.

첫 작품은 평이했다. 토끼 인형을 보고 앞글자를 따 토토라고 하는 것은 보통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이름이니까. 그 후 얼핏 아이가 돌돌아 돌돌아 하고 부르는 것이 있었는데 아이방에 있는 수 십 개의 인형들 중 무엇을 지칭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궁금증을 참다못해 직접 물어보았다.

어이없다는 아이의 표정.


"저 돌고래 인형이잖아. 돌고래여서 돌돌이. 아빤 그것도 몰라?"


순간 놀랐다. 토토와는 급이 다른 파격이었고 인형과 이름이 너무 매칭이 잘되었으며 어감 자체도 너무 귀여웠다.


딸아이는 이후에도 작년에 분양받아 온 하얀 털의 햄스터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지어 부를 때마다 우리는 한가족임을 상기시켜주었고 학교에서 받아온 강낭콩에게는 '나비'라는 이름을, 대나무 마디처럼 생긴 식물에는 다니는 학교의 이름을 따 '초등'이라고 붙여 주었다. 사물의 생김과 아이가 짓는 이름들이 어쩌면 그렇게 잘 맞아떨어지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는 이름을 짓는 모든 일을 아이의 몫이 되었다.


이후에도 토토보다 작은 디즈니 토끼 인형에게는 '토니'라는 미국식 이름을, 흰색과 회색 줄무늬가 반복되는 인형에게는 '패턴이', 엉덩이가 부각된 강아지 인형에게는 엉덩이를 찰싹 때리고 싶은 마음에 '찰떡이'로 지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듣고 있으니 작명의 과정이 너무 재밌었다. 그래서.


토토, 토니, 찰떡이, 돌돌이, 패턴이

나도.

얼마 전, 아이들 영어 애칭을 지어 주었다. 정식으로 사용할 영어 이름은 본인들이 나중에 스스로 짓는 게 좋을 것 같아 애칭 혹은 아명 정도로 삼을 이름을 지었다.

'키스'와 '코이'

별생각 없이 아이들 이름 석자의 영문 이니셜 발음을 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 되었다. 아이들도 마음에 드는지 요즘은 그렇게 불리길 원한다.


내친김에 장난 삼아 우리 가족의 좋아하는 색깔로도 이름을 붙여보자고 딸아이가 제안했다. 검은색을 좋아한다는 나에게 딸아이는 지그재그 모양도 좋아하냐 묻더니 '지. 블랙'이라고 지어주었고 나는 그에 대한 화답으로 민트색을 좋아하는 딸아이에게 아이 이름 한글자를 언어유희로 엮어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투(two, too). 민트'라고 지어주었다. 다섯 살인 빨강을 좋아하는 아들의 이름은 '레드. 파이브', 녹색을 좋아하는 아내에게는, 아내 모르게 '네버(never). 그린'이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다 지어놓고 보니 그럴듯한 아이돌 그룹 멤버 이름 같다며 우리끼리 키득키득거렸다.


역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단순한 의미 이상이라는 김춘수 선생의 통찰은 틀림이 없다.




주위에 이름 지을 만한 것들을 또 찾아본다. 애정을 줄만한 것들이 뭐가 있을까.


춘천의 우리 집. 우리가 빌린 집. 비슷하지만 개성있는 주택들이 담도 없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해 질 녘이면 아이들이 몰려 다니며 이집저집 기웃거리고 마당에서 넘치게 자란 상추, 토마토, 오이를 서로 나누어 먹는 동네. 이 공간에 애착이 생긴 지 한참 되었다. 많은 손님들이 머물다 가며 칭찬해 주었던 이 공간에도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당연히 그 일은 딸아이의 몫이 될 것이다. 우리집에 이름이 생기면 우리 가족은 집에 대한 애착이 더욱 커질 것이고 그 애착은 가정을 보다 화목하고 단란하게 붙잡아 줄 힘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집의 이름을 짓는 데에는 아이들 이름 못지않은 공을 들이고 다. 래미안, 아이파크, 푸르지오 같은 식상한 이름 말고 정말 세상에 없는 너만의 유니크한 이름을 지어 줄게. 


초등학생인 아이가 지은 이름. '초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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