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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래불사춘 Sep 04. 2021

첫회사, 조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대부분의 불이익은 불의였다


대학 졸업반, 1년여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준비한 언론고시는 막막함과 좌절, 열패감만을 안겨주었다. 두어 번 여러 전형에서 살아남으내심 기대를 걸었던 적도 있었지만 초심자의 행운으로 뚫어낼 수 있는 시험이 애초에 아니었다. 그냥 언론고시를 준비한다는 것 자체에서 어떤 위안을 얻어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언론고시 준비생들은 준비한다는 것 그 자체에도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내 능력 부족과 현실을 깨닫고 뒤늦게 일반기업들의 채용공고를 하나도 빠짐없이 훑어보았고 제목과 회사 이름만 바꿔가며 지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대부분 서류에서부터 선택받지 못했고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 중의 일부만이 너그럽게 모든 지원자들의 서류를 통과시키직무적성평가까지는 받아볼 기회를 주었다. 가까스로 들으면 알만한 기업 중에 면접까지 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결국 최종합격자 명단에서 이름이 확인되거나 합격을 축하하는 메일이나 문자를 받아보지는 못했다. 그렇게 그 해는 겨울로 접어들었다.


12월. 채용시즌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꼼짝없이 취업재수생의 신분으로 내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두어 곳 면접 결과를 기다리고는 있었지만 섣부른 기대는 실망의 강도를 높인다는 것을 몇 달간 몸으로 터득한 상태였다. 다시, 몇 년은 기본으로 걸린다는 언론고시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를 고민하던 크리스마스이브 오후에 문자가 하나 왔다. 최종 합격.




유능한 인재들이 미리 좋은 곳으로 다 빠져나간 상태라 고만고만한 남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온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몇 군데씩 합격하여 골라가기도 한다지만 나에겐 채용시즌 전반에 걸쳐 유일한 최종 합격지였다. 합격소식을 전하며 친구들 앞에서는 짐짓 언론고시를 더 해볼지 고민하는 척했으나 이미 마음은 나를 받아준 그 기업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시 우리들에게 졸업 전 취업이라는 것은 상당한 성취였다. 그 성취감에 도취되어 연말연초를 흥청망청 즐길 수 있었고 곧 신입사원 연수가 시작되었다. 취업이라는 지상 최대의 과제를 해결한 젊은 남녀들이 모인 자리는 캠퍼스를 처음 구경한 대학 신입생 이상으로 설렘과 흥분이 넘쳐났다. 자화자찬과 자가당착에 빠진 교육팀 직원들에게 회사의 눈부신 성장과정에 대한 교육을 받고 적당하게 매력적인 이성 동기들과 팀을 꾸려 미션을 해치워 나가면서 이제는 사회의 건실한 구성원이 되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으니 들떠 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렇게 꿈같던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고 나를 포함한 동기들은 OJT를 위하여 육 개월간 매장의 판매직원으로 변신했다. 국내 최대의 전자제품 양판점이었던 회사는 당시에 전국 300여 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었다. 출신 지역에 따라 전국의 규모가 큰 매장들 위주로 신입사원들이 배치되었고 거기서도 실적을 평가하여 점수를 매기고 이것이 나중에 본사의 부서 발령에 영향을 줄거라 했다.


매장 근무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전자제품을 사기 위해서 매장에 온다. 나는 그들을 친절하게 맞이하여 제품의 특징, 다른 모델과 비교한 장단점, 사용방법 등을 설명해주었다. 고객들은 나를 신뢰하는 편이었다. 혼수나 이사처럼 한꺼번에 많은 물건들을 사러 오는 분들은 티브이,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내 담당구역이 아닌 비싼 물건을 고를 때도 나에게 상담을 의뢰했고 내 말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하루 종일 서서 근무하느라 몸은 힘들었지만 정신은 건강했다. 고객들에게 인정받는 느낌도 좋았고 직원들끼리도 술 한잔씩 하며 형, 동생으로 지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매장에서의 OJT가 끝나고 본사 발령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딱히 원하는 부서는 없었고 대학 전공이 홍보라 담당자는 홍보팀으로 가게 될 것이라 미리 귀띔했다. 각 팀이 무슨 일들을 하는지도 몰랐고 어느 부서가 힘이 있어 진급에 유리할 지에 대한 관심도 없었기에 그저 전공을 살려 광고와 홍보를 담당하게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하며 매장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보냈다.


부서 배치는 모든 신입사원들이 본사의 회의실에 모여있으면 인사팀 담당 직원이 한 명씩 호명하며 배정된 부서를 발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름이 불린 동기들은 배정된 사무실 위치를 안내받고 바로 출발했다.  이름은 거의 마지막에 불렸다. 서너 명 정도나 남았을까. 내 이름이 불리고 그 뒤에 배치될 부서의 이름이 이어졌다.

 

"서비스팀."


'서비스팀?'


홍보팀이 아니라는 것에 먼저 어안이 벙벙했고 뒤이어 서비스팀이라는 곳이 회사에 있긴 했는지 궁금했다. 끝까지 들어보니 홍보팀에는 다른 여자 동기의 이름이 불렸다.


서비스팀은 본사에 있지 않았다. 알고 보니 물류와 서비스만을 담당하는 계열사가 따로 있었고 위치도 서울이 아닌 경기도 후미진 곳이었다. 동기들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로 버스에 올라타고 서비스팀으로 향했다.


한여름 서쪽을 향한 창으로 오후 네 시 정도의 햇살이 비친 서비스팀의 사무실 풍경이 아직 기억난다. 낡은 건물의 초라한 사무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얼른 집에 가고픈 욕구가 치솟았다. 가까스로 인사를 하고 설명을 들어보니 서비스팀은 전자제품 고장이 났을 경우 애프터서비스를 담당하여 전국 각지의 서비스센터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고장제품 수리에 소요되는 기간을 줄이고 서비스 품질향상을 위해 센터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었다.


며칠 근무하면서 천천히 업무를 파악하다 보니 전체적인 윤곽이 잡혔다. 서비스팀은 한직 중의 한직이었다.  문제를 일으켜 좌천되어 온 직원이 여럿 있었고 부서의 선임은 대놓고 썩은 동아줄을 잡은 신세를 한탄했다. 새로 발령받은 팀장들은 매하나 어두운 얼굴로 업무파악을 시작했다. 기업의 구조상 부서가 바뀔 일은 거의 없었다. 하루하루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꾸역꾸역 출근은 했지만 나를 감싼 모든 것이 불만족이었다.


해를 넘기고 다시 봄이 왔을 때는 마음의 결정이 되었다. 버티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버텨서 나은 미래를 기대할 가능성이 없다면 하루빨리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일분일초도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을 때 사직서를 제출했다. 팀장과 인사팀 직원의 형식적인 만류가 한차례씩 있었다. 그래도 완강했던 나에게 팀장은 그 순간부터 존댓말을 하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인사팀 직원에게는 어차피 나갈 거 부서 배치가 하루아침에 바뀐 이유나 알자고 몰아세웠다.


들어보니, 원래  자리로 오기로 되어있던 직원이 있었는데 그 직원이 이 자리로 오기 싫어했다. 마침 그 직원은 이 회사 임원의 조카였다. 임원에게 부서변경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둘이서만 맞바꾸기에는 티가 나니 다른 직원 한 명과 엮어서 세 명의 부서가 한 칸씩 이동한 것이다.



이제는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특히 인사에 있어서는 청탁과 불공정이 난무하는 것도, 청탁할 끈조차 가지지 못한 스스로를 탓해야 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다만 당시의 나는, 사회의 정의를 생각하며 언론사에 들어가고 싶었던, 사회의 공정성에 높은 기대를 갖고 있었던 나는, 조직의 생리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건 그냥 버려야만 했다. 부조리가 판치는 더럽고 냉정한 이 조직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했다.


4월 말의 마지막 출근날, 형식적인 작별 인사를 마치고 좀 일찍 사무실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처음 사무실에 들어섰던 날과 비슷한 오후 시간이었다. 홀가분했다. 다시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겠지. 도중에 갑작스러운 봄비가 제법 내렸다. 우산이 없었지만 나는 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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