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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래불사춘 Sep 12. 2021

춘천, 주택에서의 봄여름이 지나고

반주의 기억을 반추하다


9월이다. 여름이 유난히 더웠다. 예전에는 덥다 덥다 해도 여름은 항상 더운 거지 뭐 유난을 떠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삼사 년 전쯤 기록적인 폭염이 있었던 해부터 비로소 더위가 같은 더위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었다.  


그러나 올해는 삼사 년 전의 폭염보다도 심했다. 춘천은 특히 더 더웠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특성상 여름엔 덥고 겨울에는 춥다고 듣긴 했지만 춘프리카/춘베리아라는 별명은 이름값을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뉴스의 날씨정보에 전국의 한낮 최고 기온이 춘천이 제일 높은 것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그래도 강원도인데. 한여름에는 아무것도 할 수없방 안에서 에어컨을 틀고 늘어져 있기만 했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오면 동향인 집의 아침 햇살에도 출입문 손잡이는 라이터로 지진 듯 데워져 있었다. 그런 여름이 가고 낮과 밤이 다른 계절이 왔다. 밤으로는 이미 으스스한 기운이다. 이제는 겨울이 두렵다.


춘천 전원주택으로 이사한 지 육 개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낯선 도시에서의 삶, 로망이었던 전원주택의 생활도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다. 봄과 여름이 지난 지금 지난 육 개월을 한번 돌아본다.




3월의 첫날, 기존의 루틴한 삶에서 독립하듯 새벽같이 일어나 이삿짐을 싸던 때가 떠오른다.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왔고 정든 집을 떠나는 아쉬운 마음과 새로운 보금자리에 대한 기대가 뒤섞여 오묘한 기분이었다. 빗길에 강원도로 오는 길은 막혔고 모든 일정이 서서히 늦어졌다. 저녁 여덜시에 이사가 끝이 났고 밖을 보니 때아닌 폭설이 쌓여 있었다. 넉가래를 빌려 집 앞 제설작업을 하다 쓰러져 잠들었다.


다음날부터 아내와 아이들은 회사로, 학교로 정상적인 스케줄이 시작되었고 나는 홀로 덩그러니 남겨져 한동안 우울했다. 쌓여있는 이삿짐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 여기저기  쌓여 있는 습기 많은 눈덩이를 보며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이사 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무리한 선택이 아니었는지 하는 의심이 한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가족들 출퇴근/등하교를 시켜주고 집안일과 이삿짐 정리를 하며 3월 한 달을 보냈다. 그나마 아내 퇴근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 둘과 보냈던 봄날 오후의 시간이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둘째 유치원 옆의 한림대학교 후문으로 들어가 길냥이들과 자주 놀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로 들어가면 대학생들은 신기한 듯 우리를 쳐다보곤 했다. 평일 오후 늦게 아이 둘을 데리고 캠퍼스에 나타난 중년의 남자. 그래도 착한 학생들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다.(애들 덕에.) 새끼 고양이가 태어난 곳을 알려주기도 하고 고양이 먹일 간식을 우리 아이들에게 줘 보라고 나눠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행복해 다.


길냥이들에게 간식 주는 딸아이


매일 아이들은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두세 시간을 밖에서 보내야 했다. 한림대 고양이 외 어린이박물관에서 그림을 그리고 점토로 만들기를 했고 롤러장에서 스케이트를 고 도서관에서 책과 영화를 보는 일정을 요일별로 반복했다. 유난히 따뜻한 날은 집으로 잠깐 돌아와 맨발로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4월이 되자, 봄으로 먹고사는 도시, 춘천에 봄이 왔다. 집 안팎으로 온기가 돌기 시작했고 별러왔던 손님맞이가 시작되었다. 가족, 친구, 친지, 회사 동료 등 다양하게 춘천까지 어려운 걸음을 해주었고 반가운 얼굴을 만날 때마다, 나의 집과 삶의 방식을 추어올려줄 때마다 춘천 생활의 만족도는 큰 폭으로 상승했다. 또 떡 대신 커피를 들고 우리 단지의 모든 집들을 차례대로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건조한 반응도 있었지만 완벽에 가까운 이웃도 생겼다. 대부분 생활과 마음에 여유를 가진 건강한 사람들이었다.


5월. 춘천시정 소식지의 삼행시 응모에 당선되었고 춘천문화재단의 문화사업 공모 프로젝트에 지원한 것이 선정되었다. 춘천시민으로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전원의 단독주택으로 이사 왔으니 집을 많이 활용하고 싶었다. 5월 말에 엄마의 칠순잔치를 우리 집에서 하자고 고집했다. 거실에서 칠순 상을 차리고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것으로 가정의 달이 의미있게 마무리되었다.


직접 차린 엄마의 칠순상


6월. 마당에 풀이 자라는 것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계속되는 손님맞이에 대청소를 했다. 유리창까지 박박 닦으니 마음도 투명해졌다. 아내의 장기출장이 있어 한 달 내내 독박 육아를 했다. 왠지 혼자 한다는 사실이 뿌듯하기도 했고 쓸데없는 감정소비가 없으니 편하기도 했다. 와중에 딸아이의 8살 생일파티에 열명이 넘는 동네 꼬마들을 모두 초대하여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아이는 내내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동네 전체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퍼졌다. 다음날 평창에서 아내의 영화 축제가 개최되었고 현장으로 가 2박 3일 동안 아내를 열심히 응원했다. 아이들은 동물농장에서 말을 타고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살림살이는 계속 늘어났다. 집을 더 꾸미기 위해 데크에 놓을 야외테이블, 파라솔, 해먹, 수영장 등 짐들이 자꾸 쌓여갔다. 나중에라도 아파트로는 못 돌아갈 것 같다.

아이의 생일, 우리 집에 모인 동네 꼬마들

7월이 되니 잔디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아내가 잔디 좀 깎으라고 닦달했지만 더웠고 귀찮기도 했고 내 눈에는 괜찮아 보여서 티고 있었다. 더위에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시원한 방에서 올림픽을 보며 삶을 달랬다. 김연경의 활약을 보며 불끈 주먹을 쥐기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상승세였던 춘천 생활은 이제 일상이 되니 심드렁 해졌고 아내는 퇴사를 선언했다 번복했다. 걱정에 마음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8월 이웃에게 기계를 빌려 잔디를 깎았다. 군대에서나 시골에서 벌초할 때 쓰던 무겁고 위험한 예초기가 아닌 밀고 다니는 잔디 깎는 기계를 쓰니 여기가 미국이었다. 날은 여전히 더웠고 마음은 계속 어지러웠다. 복직과 부부관계, 하고 싶은 일과 미래에 대해서 여러 날 동안 생각했다. 뾰족한 답이 없는 주제들이었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고민할 뿐이었다.




술을 마셨다. 매일 집에서. 혼자.

동네 사람들 외에는 아무 때나 편하게 술 한잔 할 친구를 만들지는 못했고 술집을 가려면 택시를 타거나 대리를 불러야 했으며 코로나는 아직도 극성이었다. 비가 오면 막걸리를, 한여름 더위엔 맥주를, 국물이 있으면 소주를, 아내와 싸우고 나선 와인을, 중국음식을 시키면 연태고량주를, 친구들이 멀리서 오면 양주를 마셨다. 그렇게 매일 기분이 좋아서 마시고 나빠서 마시고 설레서 마시고 우울해서 마시고. 취한 기분이 좋았다. 폭음을 하지는 않았다. 처음 춘천행을 결정하며 목표했던 입신양명보다는 안빈낙도를 추구하는 삶. 한가지만은 확실하게 달성했던 춘천 주택에서의 봄여름이었다.


술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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