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gar Cello Concerto
슬프고 애절해. 바늘로 어디든 푹푹 찌르는 것 같고, 찔린 곳은 너무 아픈데 또 아프진 않았다. 목 놓아 울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러다가 다시 울고. Elgar Cello Concerto는 나한테 왠지 그런 곡이었다. 입시곡으로 만나 적어도 1,000번 이상 연주한 이 곡은 아우르는 감정의 폭이 넓어서인지 늘 위로처럼 느껴졌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작곡되었기 때문에 회상적인 어조를 가지고 있어 쓸쓸하고 암울함이 약간 감도는 곡이다. 작곡가 엘가에겐 사랑하는 아내가 곡의 초연 이후에 떠나는 아픔이 또 한 번 찾아오고, Elgar Cello Concerto 하면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자크린 뒤프레의 연주까지 하나로 묶여 이 곡은 엄숙하고 숙연함으로 오랜 시간 정의 내려져 왔다.
Elgar Cello Concerto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은 이 곡이 가지고 있는 일련의 이야기들에 최선을 다하듯 온 힘과 감정을 활에 실었고,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무언가가 된 연주자들의 혼은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았다. 나는 한없이 애상적인 이 노래가 참 좋았다.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이 노래에 켜켜이 쌓인 한없는 슬픔에 몸을 숨길 수 있겠다 싶었거든.
원곡자 엘가가 직접 지휘한 Elgar Cello Concerto 음반을 듣게 되었다. 앞서 적었던 표현들이 무안해지리만큼 익숙한 느낌의 연주가 아니었다. 그래서 엘가가 지휘한 음반을 듣고서 조금 놀란 나는 그의 디렉팅에 연신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활을 꾹 눌러서 소리를 현에 끈적하게 붙이지도 않았고, 절절하게 감정 표현을 할 정도로 연주자에게 시간이 주어지지도 않는다.(연주자의 스타일일 수도 있지만, 원작자의 디렉팅이니 의견이 좀 더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 클리셰처럼 느껴져도 이 부분에선 반드시(기필코!) 감정이 고조되어서 터져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좋아하는 곡의 이면을 마주하게 되어 새롭고 설렘의 연속이었다. 나의 넓은 감정의 진폭을 가려주어서 자주 이 곡을 찾았던 그때의 내가 이 음반을 들었다면 약간의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였달까.
배경적으로 이 노래가 슬픔을 머금고 있는 건 사실이다. 원곡자 엘가도, 당대의 사람들도, 그리고 이 곡의 대표적인 연주자가 된 자크린 뒤프레도 많은 걸 잃었고 상실과 괴로움을 자주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엘가의 디렉팅 음반을 들은 후엔 오늘날의 Elgar Cello Concerto는 너무 슬프게만 표현되고 있는 게 아닐까. 언제부터 이 곡에 수많은 애상이 더해져 겸허해지는 곡이 되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엘가 콘체르토는 극에 달하는 슬픔을 연주하거나 농도 짙은 소리를 내야 주목받을 수 있는 곡이 되어버린 걸까.
‘어떤 부분을 어떻게 들리게 만들지는 연주자 각자의 판단이다. 연주자들은 곡의 구조를 분석하고, 각 파트의 의미를 고민하고, 홀이나 레코딩 스튜디오의 어쿠스틱을 점검하고, 그 곡이 쓰였던 당시 작곡가의 삶을 알아보고, 생사에 찾아가 보고, 책을 읽어본다.
모두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다른 이상향을 꿈꾸며 그곳에 근접하는 연주를 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한다.’ <아무튼, 피아노-김겨울> '무한히 변주되는 약속 115p'
내 머릿속에 맺힌 이 곡의 상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노래이다. 그리고 엘가의 디렉팅도 그의 표현이자 당시의 노래였다. 손 끝에 살이 갈라져도 표현해내고 싶었던 어떠함을 향한 노력. 그리고 회고에서 아픔만을 떠올리지 않으려는 그의 담담한 편지. 그러니 이 곡에 대해 원작자보다 슬픔의 크기를 확대해석 했느니, 곡의 해석들이 뻔하다느니 여타 다른 말을 덧붙일 이유가 없어졌다. 그것은 엘가와 수많은 연주자들이 쌓아 올린 노래일 테니.
새로운 시각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좋아질 이유가 앞으로도 무궁하겠구나. 자유롭게 즐기고 노래할 이유를 하나 더 만났다.
* 1928년 레코딩된 음반으로 녹음 퀄리티는 조금 떨어질 수 있음.
https://youtu.be/HWPzhEyoK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