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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Sep 18. 2022

여월, 旅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

숨 막히는 적막 가운데 무겁게 내려앉는 저음이 일상이었습니다. 1악장 도입부에서 들을 수 있는 피아노 노트의 분주함이 끝없이 몰아치는 감정이라는 모래바람이었다면, 그 위로 쌓이는 대선율들은 고조되는 감정의 파도와도 같았습니다. 그것들이 사그라드는 날은 없었습니다. 결국엔 다시 무거운 채로 더 심각해지는 날들의 연속이었죠. 그 누구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할 상태였습니다. 물론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고요. 자기 연민이라고 하기엔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살아갈 이유와 방법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억지로 등 떠밀려 사는 거 말고, 진짜 살고 싶었거든요.


이런 생각을 반복하다 보니 문득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고 다시는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엄히 굴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꾸짖음의 결과는 결국 스스로 낸 상처를 마주하는 것이었죠. 처음으로 스스로 미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깊게 파인 상처를 낸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이라는 것에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가장 외로운 곳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왔구나'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구태여 모두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그저 이 협주곡의 1악장이 꼭 제 마음과 같았다는 말만 남겨둡니다.


시간이 흘러 생일이라는 날이 돌아왔습니다.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고요, 이제는 지난 시간들을 잘 매듭지어서 안아주고 위로하며 보내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솔직하고 가감 없는 감정을 글로 자주 쏟아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문장들을 마주하니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양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어쩜 그리 아프고 쓰리게 표현을 해두었을까요. 천천히 이전의 기록들을 읽어보며 "고생했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숱한 바람과 파도 속에서도 완전히 흔들려 뿌리째 뽑히지 않고 잘 버텼구나, 비로소 나를 지킨 것은 사랑이었구나라는 설명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동안의 시간에 1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의 나는 해 아래에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나를 비추는 빛 아래에서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더 이상 삶이 막막하지 않고 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반가운 말을 안부로 전합니다. 시간이 흘러 5월이 되었네요. 나의 삶도, 당신의 삶도 내내 평안하길 바랍니다.' <그림자>


라흐마니노프도 같은 마음이었을까요. 무기력증을 딛고 일어나 무겁게 떼는 1악장의 걸음에서 3악장의 흐르는 강물처럼 걷게 되었을 때에 마음 말입니다. 따뜻한 햇살과 시원하게 부는 바람들이 그에게 일어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을 겁니다. 때마다 곳곳에 흘러넘치는 사랑을 발견했던 저처럼 말이죠.


5월이 지나 9월이 되었네요. 감사하게도, 그리고 이제는 당연히 삶이 더 이상 벌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차고 이지러짐에 익숙한 달처럼, 나그네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행자로서의 설레는 2막이 시작되겠네요. 자유로이 유영하다 마주합시다.


평안과 사랑을 담아 보냅니다.


https://youtu.be/fr976_FAF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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