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춘천#일당백리턴즈#쓸모있는딴짓
인디고는 한 협동조합을 통해 방과 후 활동과 여러 치료 서비스를 받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인디고의 독특한 드로잉이 미술치료 선생님의 눈을 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발 벗고 나서서 조금 더 개별적으로 레슨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으셨지요. 한 다리 건너의 인연을 통해, 인디고와 저는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 수업을 하기 전 미술치료 선생님께서 인디고에 관해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동안의 미술 작업 내용뿐 아니라 인디고 특유의 행동 양식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알려 주셨어요. 작품을 사진으로 전해주신 것으로도 모자라 실물도 몇 점이나 보내 주셨지요. 인디고를 향한 선생님의 애틋한 관심이 느껴지는 동시에, 인디고의 특성을 인해 염려하시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답니다.
자폐는 '스펙트럼'이라고 불릴 만큼 폭넓은 양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러 친구에게서 자주 관찰되는 특징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중 하나가 '루틴(Routine, 틀에 박힌)'에 대한 선호입니다. 이러한 성향이 있는 자폐인은 한 번 루틴이 형성되고 나면 그에 변화가 생기는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아직 사회화가 충분히 되지 않은 어린이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더욱 또렷하게 나타납니다.
예시 ① 자폐 아동 주황이가 8살 때의 일입니다. 주황이는 집에서 간식으로 C브랜드의 250mm 오렌지 주스를 마시곤 했습니다. 하루는 주황이가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워해, 함께 가까운 슈퍼로 나갔습니다. 작은 나들가게여서 상품군이 많지 않았어요. 적은 용량의 주스는 사과맛뿐이었고, 오렌지 주스는 커다란 페트병 규격뿐이었지요. 주황이는 즉시 모든 제품을 거부하고 울면서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습니다.
주황이는 편식 역시 무척 심했습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간식도 쉽게 먹으려 들지 않았어요. 나중에 조금씩 군것질을 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한동안은 특정 브랜드의 제품만 고집했지요. 사실 예시의 사건 당시의 주황이는 상당히 루틴의 폭이 넓어진 상태였습니다. 아마 작은 사이즈의 오렌지 주스가 있었다면, 꼭 마시던 브랜드가 아니었어도 큰 문제가 없었을 거예요.
예시 ② 10살 자폐 아동 민트의 보호자는 교대 근무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한 달에 한 번은 정해진 요일에 수업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주에는 작업실의 상황에 따라 다른 날 보강을 잡고는 하는데, 보호자는 해당 스케줄을 알게 된 즉시 민트에게 알리고 수업 당일이 되기까지 "목 5시 미술 수업이 있어." 하는 식으로 고지해 줍니다.
한 주 간의 일정 자체에 대한 루틴이 형성된 자폐 아동은 꽤 많은 편입니다. 하루의 스케줄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아동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특히 부담을 줄 수 있을 만한 치료나 학습 같은 일정을 두고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특수 교육 담당자가 있는 기관에서는 매일 해야 할 일을 표로 만들어 미리 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 단위로 된 글이나 그림으로 된 일과표는 가정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리츄얼(Ritual, 의식)은 루틴의 확장 격으로 형성됩니다. 자폐인과 미술 수업을 진행하면서, 창작의 동력이 되는 동시에 한계가 된다고 느끼는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리츄얼은 간단히 말해 고정된 일련의 행동 패턴입니다. 웃어넘길만한 재미있는 리츄얼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과 함께 수업을 하는 민트의 경우, 전동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기 전에 부모님을 잡아끌어 두 분이 손을 꼭 모아 쥐게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연필을 깎게 되면 당황해하며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일어섭니다. 가끔은 울먹이거나 화를 내기도 하지요.
감히 말하건대, 인디고에게 있어 그리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리츄얼입니다.
우선 소재를 고릅니다. 루틴 중에서 말이지요. 소, 말, 상어, 바다거북, 고래 중 하나입니다. 최근 몇 달 간은 어쩐 일인지 소와 말로 범위가 대폭 축소되었더군요. 초벌 작업의 재료 역시 루틴 가운데 고릅니다. 크레파스와 유성 마커입니다. 처음에는 크레파스만 사용했는데, 꾸준히 권하고 연습해 지금은 마커도 능숙하게 사용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책상을 탕탕 치면서 울거나 크레파스라고 수십 번 외치는 일이 있었음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짐작이 가실 듯합니다. 쓱쓱 그려 나가기 시작하는 대상의 형태와 색채는 인디고에게 있어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예쁜 입과 동그란 눈, 오렌지빛 땅, 어두운 청색의 하늘…
날씨를 바꾸어 보자고 해도, 모자 같은 액세서리를 달면 어떨까 해도, 산 대신 도시를 넣어 보자고 해도 인디고는 막무가내입니다. 주황색을 감추어 두면 가장 닮은 황토색을 골라서 칠합니다. 그러다가 설움이 북받쳐 "주황색 주세요!" 하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지요.
독특하고 근사한 인디고만의 생명체 묘사는 그런 고집스러운 리츄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 창의성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심정 역시 듭니다. 하지만 미술을 가르치는 강사로서는 인디고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자폐인이라면 누구나 자기 세계에 갇혀버릴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벌써 발목까지는 잠겨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겁니다. 저는 미술이 인디고에게 있어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리츄얼의 발산이 되기보다는 외부를 향한 소통의 창구가 되었으면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인디고가 자신만의 리츄얼을 충분히 즐기도록 둡니다. 그다음 인디고에게 있어 리츄얼 밖의 외부 매개체로 생각될 만한 제3의 재료인 물감을 제시합니다. 물감을 사용해 추가적인 이미지의 층위를 올리는 것은 인디고에게 있어서도 즐거운 일로 보입니다. 인디고는 자신이 사용할 색깔을 직접 고르는데, 기본 드로잉에서와 달리 다채로운 선택 폭을 갖습니다. 제가 별도의 종이에 새롭게 올릴 꽃이나 점, 선의 예시를 그려 보여 주면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그립니다. 이러한 과정은 말만 없을 뿐, 대화처럼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소통을 함에 있어 언어에 의지하는 폭이 큽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한다고 하면, 우리는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단어를 고르게 되지요. 반면 자폐인 가운데 많은 수는 언어로 의사를 표현하는 일에 서툽니다. 인디고 역시 그렇습니다. 제한적인 발화를 갖고 있고, 무언가를 요구할 때도 한두 단어로 구성된 짧은 말로 합니다. 그나마 내용마저 몇 가지로 정해져 있지요.
인디고의 드로잉은, 그림을 그린 본인보다 훨씬 수다스럽습니다. 인디고의 미술치료 선생님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셨지요. 또 제가 들었고요. 작업실을 찾아 주시는 많은 분들 역시 기쁘게 귀 기울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께서도 듣고 계십니다.